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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285

성저십리城底十里, 도성밖의 도성 조선시대 수도 서울의 범위는 한양 도성으로부터 10리(약 4.5Km)로 삼았다. 대체적인 범위는 알고 있었으나 그게 법에 정해져 있는 것을 아는 분은 많지 않다. 물론 이도 조선 전후기에 약간 차이가 있긴 하다. 일단 이 법 조문을 바탕으로 설정한 이후 조선 전후기 성저십리를 증손하면 정확한 지도가 완성될 것이다. 《대전통편(大典通編_》 〈형전(刑典) 금제(禁制)〉 ○ 도성 10리 안【동쪽으로 대보동(大菩洞)·수유현(水踰峴)·우이천(牛耳川)·상벌리(上伐里)와 하벌리(下伐里)·장위(長位)·송계교(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까지 시내를 한계로 삼는다. ○ 남쪽으로 중량포(中梁浦)·전관교(箭串橋)·신촌(新村)·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까지의 시내와 강을 한계로 삼는다. ○ 북쪽으로 대보동(大菩洞)·보현봉.. 2020. 10. 28.
홍문록弘文錄, 출세의 보증수표 조선에서는 출세에 이르는 정로가 과거 급제였지만, 과거 급제만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아니었다. 신분제가 공고한 사회였다. 일전에 포스팅 했던 문과급제자 만 갈 수 있는 자리로 규정된 '병용문관' 해당 관직 가운데 청요직에 갈 수 있는 사람도 따로 자격이 있었다. 바로 홍문록에 들어야 했다. 문명을 세상에 떨칠 정도가 되거나 백그라운드가 우수해야 홍문록에 들 수 있었다. 이들이 대부분 청요직을 독점하고 당상관에 이를 후보군이었다. 조선에서는 과거에 급제해도 임용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정조 때가 심해서 정순왕후가 섭정할 때 과거에 급제하고도 임용되지 못한 사람을 파악해 올리라고 하는데, 많은 이가 고인이 되었어도 임용조차 되지 않은 급제자가 80명 가까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홍문록.. 2020. 10. 28.
매맞는 사위, 재산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모쯤이야 기채奇采는 고려말 권신 기철奇轍(?~1356)의 현손玄孫이다. 《성종실록》 5년 4월28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논찬이 실렸다. 사신史臣이 논평한다. “정효상鄭孝常은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괴과魁科에 발탁되자 기씨奇氏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아내)의 집은 상당히 재산이 많았으며, 아내의 성격은 교만스럽고 사나와서, 정효상을 대하기를 노예처럼 해서 손발도 제대로 놀릴 수 없게 했다. 더욱이 그 장모는 더욱 성격이 사나와 때로는 정효상에게 매질까지 해댔다. 정효상이 일찍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었을 때는 관기官妓를 지독히 총애해서 심지어는 몰래 그 집에 가서 자고 오기까지 했으니, 그는 이 정도로 행검行檢(행동의 절제)이 없었다. 어세공魚世恭은 성격이 경솔하고 허세를 부리는 데다 익살을 좋아했다. 심정원沈貞.. 2020. 10. 28.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읊은 국화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작은 국화와 나비를 읊다.[詠小菊蛺蝶]〉 가을 국화 한 송이 외로이 피어 있어 작은 나비 날아와 풀잎에 앉아 있네 수많은 세상 사람 부귀영화 다투는데 쓸쓸한 네 모습이 늙은 나와 흡사하이 一枝寒菊不成叢 小蝶飛來在草中 多少世人爭集菀 憐渠寂寞似衰翁 2020. 10. 28.
원나라 때 방추차 사용법 원나라 왕정王禎의 《농서農書》에 수록된 그림이다. 청동기시대 방추차보다는 발전된 기술일 것이다. 왕정의 《농서農書》는 당시 이슬람을 통해 들어온 과학기술이 광범위하게 반영되어 있다. 스크류식 양수기나 각종 기어 장치 심지어는 타자기까지 소개되어 있다. 청나라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 반영이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서유구徐有榘(1764~1845)의 《해동농서海東農書》가 이를 잘 수용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미 중종 때 출간하였던 듯하다. 《중종실록》 38년 11월 5일에 동로東魯 왕씨王氏)【명나라 사람.】 의 《농서農書》를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농상農桑·관개灌漑에 관한 것이 그 안에 갖추어 있으니, 개간開刊하여 널리 펴서 백성이 다 볼 수 있게 하면 아주 좋겠다. 개간할 것인지를 대제학大提學 .. 2020. 10. 27.
거짓으로 얼룩진 행장行狀 [알리바이] 20세기 초 조선이 무너질 즈음 어떤 인물의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이나 묘갈명 등이 차츰 진실은 안드로메다로 보내고 원고료에 따라 써주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었다. 특히 그 벼슬이 가관이다. 조선의 관료 인사 행정은 까다롭기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 법적으로 ‘병용문관(竝用文官)’ 즉,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쓴다고 규정된 자리가 있었다. 아래 사례를 들었는데, 사간원, 경연,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 승문원, 교서관, 세자시강원의 관원은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임금님 백이 있어도 임용될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는 산림(山林)이라고 하여 박지계, 송시열 같은 뛰어난 학자들을 특별채용하였는데, 이들도 병용문관 자리는 갈 수 없었다. 이런 비중 있는 인물.. 2020.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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