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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71

일제시대의 지식인: 스핀오프 (1):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제 일제시대의 교육제도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으니 노벨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かわばた やすなり, 1899~1972)의 프로필을 보자. 三島郡豊川尋常高等小学校(1906-1912) -- 茨木中学校 (1912-1917) -- 第一高等学校文科第一部乙類 (1917-1920) -- 東京帝国大学文学部 (1920-1924) 아주 심플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필자가 리뷰한 조선인들보다 시기가 약간 빨리 교육받은 사람인데도 소학교 (6년) - 중학교 (5년) - 고등학교 (3년) - 제국대학 (4년)의 기간이 잘 맞는 시계처럼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조선의 송몽규 같은 이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프로필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연전을 거쳐 쿄토제대.. 2023. 6. 18.
일제시대의 지식인: [32] 유치진 극작가 유치진 선생의 프로필이다. 통영공립보통학교 (1914-1918)--- 도쿄 토요야마(豊山)중학교에 편입 (1921-1925)--- 릿쿄대 예과 (1926-1927) ---- 릿쿄대 영문과 (1927-1931) 프로필을 보면, 선생의 보통학교가 4년인것은 이때까지도 조선의 보통학교가 4년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보통학교가 6년제가 되는 것은 1922년 부터이다. 중학교때 이미 일본 유학을 했는데 당시로서는 드문 프로필이다. 선생의 집안이 여유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 같다. 중학은 4년만에 졸업했는데 이 당시 중학은 5년제였다. 단, 학생이 우수한 경우 4년만에 졸업이 가능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릿쿄대 예과를 1년 다닌것으로 되어 있는데 중학을 졸업했으니 고등학교 과.. 2023. 6. 18.
고려의 교육열을 증언하는 고려도경의 구절들 백성[民庶] 신(臣)이 듣기에, 고려는 영토[地封]가 넓지 않으나 백성은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선비[儒者]를 귀하게 여기므로, 고려에서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은 매우 많고 땅은 평탄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은 장인[工技]에 미치지 못한다. 주군(州郡)의 토산물[土産]은 모두 관아[公上]에 들어가므로, 상인[商賈]들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시장[都市]에 가서 각각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서로 바꾸는 정도에 만족한다. 그러나 고려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色]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泛愛]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녀간의 혼인에서도도 가볍게 합치고 쉽게 헤어져註 001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참으로 웃을 .. 2023. 6. 18.
못 배운 한에 대하여 한국은 과거제가 천년을 간 나라다. 이 부분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기 쉬운데, 고려사절요만 봐도, 고려시대부터 이미 식년시는 정례화해 있었다. 3년에 한번씩 고려시대에는 34명 (조선시대와 달리 33명이 아니다) 꼬박 꼬박 급제자가 나왔다.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3년에 한번씩 34명씩 뽑아 올려도 3년 후에 다시 뽑아 올릴 인재풀이 있다는 소리니까. 고려도경을 봐도 고려시대는 과거제에 기반한 사대부 사회로 이러한 전통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갔다. 일제시대, 식민지조선이 다른 식민지와 달랐던 점은 배워야 한다는 점을 식민지 조선인에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부하면 출세한다는 것을 조선인들은 다 알았다. 돈이 없고 학교가 없어 못 갔을 뿐이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으니 한이 생길 수밖에 없다... 2023. 6. 18.
민립대 설립운동을 다시 본다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사에서 민립대 설립운동의 의의는 대단히 크다. 그 중요성에 비해 현재까지 이 운동의 시작과 실패는 조선인이 대학을 만들려고 했는데 일제가 방해해서 실패했다. 끝. 이 정도 설명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대학의 문제가 조선과 일본의 30년대 이후 차별화의 모든 근간이나 다름없다. 차별은 개인의 편견에 의해 주어 질때는 그다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차별이 구조화해서 재생산 되게 되어 있을 때가 무서운 것이다. 일제시대 후반부의 조선인 차별은 그런 식으로 구조화했기 때문에 무서운것 인데 그 구조화의 바닥에는 조선땅의 고등교육의 부재가 있었다. 이 부분을 재검토하여 전모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설하고, 전술한 바와 같이 연희전문의 대학승격이 이루어졌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 2023. 6. 18.
일제시대 연희전문의 대학승격 앞에도 썼지만 1920년대, 조선인의 대학을 세운다면 대학령에 따라 연희전문이 대학으로 승격되는 게 가장 현실성 있는 안이었다. 3.1운동 이후 민립대학운동은 전국적으로 모금하여 조선인의 대학을 세운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맨바닥에서 대학을 새로 세우는 일은 일본땅에서도 힘들었다. 일본이 대학령 발효후 제국대학 외에 대학이 된 곳은 거의 모두 기존에 전문학교였던 곳이었다. 특히 의전이 대학으로 바뀐 곳이 많았는데, 1920년대 당시 연전은 대학승격한 도시샤대학과 비슷하거나 약간 더 잘 준비된 경우가 아닐까 (학과의 수는 오히려 연전이 많고 당시 연전은 4년제였다). 만약 연전이 세브란스와 합쳐져 대학 승격을 요구했다면 일제는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그 정도 규모의 전문학교가 대학승격을 요구하면 일본 본..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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