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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940

[역사학자로서의 남당 박창화] 《중앙사단》 논문의 경우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를 내가 도서출판 김영사를 통해 공간하기는 2002년 5월이다. 직후 절친한 형 박환무가 연락이 왔다. 일본 근대 천황제를 주된 연구분야로 삼는 서강대 사학과 출신으로, 일본 유학파다. 그의 이야기인즉, 박창화가 논문을 공간한 것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진즉에 박창화를 역사학자로 보았으니,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그는 그 시대 전형의 역사학자였다. 나아가 《화랑세기》가 공개되면서 알려진 그의 유작들에는 분명히 강역과 관련된 논문도 있었고, 더불어 무엇보다 《요사遼史》지리지를 필사하기도 했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에서 그가 학술지에 공간한 논문까지 있다니, 역사학도로서의 박창화는 이제 기정사실화하는 단계에 접어든 셈이었다. 박환무에 의하면, 초기 .. 2020. 10. 21.
Cheomseongdae, observatory? altar? Cheomseongdae, built in the era of Queen Seondeok in Silla, has a lot of controversy over its function. It is regarded as an astronomical observatory, considering the record that it was a star-observing place, but to me it is an astrological altar. photo by seyun oh 2020. 10. 20.
Drastic Changes of the Han River The Han River, which runs through the central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especially the capital city of Seoul, has undergone drastic changes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Before the 1960s, there were several islands along the Han River that runs through Seoul, but since the 1970s, almost all of them have been lost in the development process whereas Yeouido Island has remained. Jamsildo, Je.. 2020. 10. 19.
역사학도로서의 박창화 남당 박창화....나는 그를 20세기 역사학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목청껏 외쳤다. 그는 화랑세기 필사자이기 이전에 역사학도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매몰되는 바람에 화랑세기 신빙론자들은 그를 역사학의 문외한으로 만들었고(왜냐하면 그래야 화랑세기처럼 위대한 역사서를 조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 위서론자들은 그를 천재역인 역사학자로 만들었다.(왜냐하면 그래야 화랑세기처럼 참으로 '교묘한' 역사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그리고 2003년 《역사비평》 투고 논문을 통해, 이 양쪽을 싸잡아 비난했다. 덕분에 그 전부터 웬수였던 위서론자들과는 여전히 웬수였지만, 그 전부터 우호적이었던 신빙론자들과도 갈라섰다. 내가 양쪽을 모두 비난한 이유는 간단했다. 화랑세기를 어떻.. 2020. 10. 19.
《간양록看羊錄》에서 만난 안행량安行梁 2004년 이래 지금 근 십년 만에 《간양록看羊錄》을 집어들어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왜적에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가던 중에 무안현務安縣 낙두落頭라는 곳에 머물던 강항姜沆(1567~1618)이 통역을 시켜 왜놈에게 했다는 다음과 같은 강항의 말이 보인다. "태안泰安의 안행량安行梁은 예전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고 하여 해마다 배가 내려오다가 표류하거나 파선하므로 가기 어려운 곳이다. 지금은 이름을 안행량으로 좋게 고쳐 행여나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여기는 수로로서 참으로 천연의 요새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지원하러 나온 명장 명名·고顧 두 유격遊擊은 전함 만여 척을 거르니고 안행량의 위아래를 가로질러 벌써 유격선이 군산포에 닿았으며, 우리 통제사(이순신-인용자)는 또 전략상 후퇴하여 중국 군.. 2020. 10. 18.
위만조선 100년은 어디로 갔는가? 이 질문에 시달린 분 꽤 있다. 위만조선 중심지가 이른바 정통 학계에서는 지금의 평양 일대라고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위만조선시대를 증언하는 유적은 단언하거니와 단 한 기도 없다. 이 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 서너곳 알려져 있을 뿐이다. 반면 그 땅에 설치되었다는 이른바 낙랑시대 유적은 쏟아졌다. 혹자는 위만조선 역사가 100년밖에 되지 않는 점을 거론한다. 또 혹자는 고고학 발굴성과의 미비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 어느 것도 타당하지 않다. 발굴성과가 미미 미비해서 소위 낙랑시대 유적 유물은 쏟아졌다는 말인가? 위만조선 역사 100년을 거론하지만 이는 동시대 위만조선과 똑같은 길을 걸은 남월왕국과 대비할 때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다. 위만조선은 대략 기원전 200-190년대 무렵에 중국에서 도망한 위만이라는..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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