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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331

18세기 호적과 노비 18세기 호적의 노비가 사실은 머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이 시대 호적을 직접 못 본 사람들이다.이 시기 호적은 주호 밑에 노비 이름을 줄줄이 적어두게 되어 있고, 이 노비들은 성도 없고 이름만 달랑 적혀 있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호적에 안 적는다. 그렇게 주호 밑에 종속된 사람들이라는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만약 머슴처럼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이라면, 주호 밑에 종속되어 적힐 리도 없고, 아버지 어머니 이름 죄다 빼고 적을 리도 없다. 거듭 말하지만, 18세기 노비는 머슴이나 이런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라, 인신이 예속된 사람들이다. 서양사에서 본다면 농노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이 상태에서 18세기 후반 거쳐 19세기로 들어가면서노비들이 주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독립 가구를 형성하고스스로가 주호가.. 2025. 9. 16.
18세기 노비를 직시해야 한다 요즘 인터넷 보면 18세기 노비는 사기라던가 그게 아니라 그때 노비는 머슴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를 보는데18세기에는 전국민 절반 이상이 노비가 맞다. 조선시대 호적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기 때문에역사를 그렇게 왜곡해서는 안 된다. 흔히 한국인들 스스로가 하는 말 있지 않는가,역사를 잊는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던가. 이 경우가 딱 그렇다. 18세기 노비를 이해해야19세기 유학 모칭자들이 여는 새로운 시대가 이해가 되는 것이다. 19세기의 그 자칭 "잔반"들은 잔반이 아니다. 몰락양반?19세기에는 몰락양반보다 더 많은 사람이 평민에서 노비에서 유학으로 올라와 았었다. 19세기의 많은 유학, 그 사람들은 원래 양반 후손이 아니라 대부분 평민, 아니 더 많은 수가 노비의 후손이었다. 19세기에.. 2025. 9. 16.
한지에 족보에 소수서원까지 문어발식 확장한 이배용 김건희 금두꺼비 논란에 국가교육위원장만 내놓아 김건희 금두꺼비 논란이 터져 장관급 국가교육위원장 자리를 사직했다가 마침내 8일 대통령이 그 사직서를 수리했다는 이배용 씨는 이화여대 총장 출신을 배경으로 총장 퇴임 뒤에 더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워낙 권력에의 지향이 강한 데다, 저 배경이 풍기는 여성계 대표주자라는 그런 데코레이션까지 가미하면서 그것을 최적화하며 영달한 대표 지식인이다. 조선시대사를 주된 발판으로 삼으면서 구체적으로는 광업사를 궁구하면서 저 전가의 보물, 곧 일제가 한국광업자산을 다 수탈해갔다는 입론을 구성한 역사학도 중 한 명이라그런 그가 느닷없이 조선서원의 세계유산 등재 움직임과 맞물려 문화재를 고리로 삼은 대중사회에 화려하게 등단하더니, 이를 고리로 삼아 문어발식 확장을 꾀하게 되.. 2025. 9. 9.
19세기 중엽 호적의 "한량" 19세기 중엽 호적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량閑良"이 무척 많다. 한량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원래 이렇게 많은 직역이 아니었다. 18세기 이전에도 향촌사회에는 양반과 평민의 중간층인 소위 "중인"이 있었는데주로 서얼로 이루어진 이들은 세상이 만만해지면 유학幼學을 받아가도 좀 빡세지면 업무業武나 업유業儒를 받았다. 한량은 거의 받지 않았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이 되면 업무나 업유는 별로 없고한량이 무지 많다. 유학과 함께 전체를 반분하지 않나 싶을 정도다.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검안 자료는 구한말의 자료로 호적 때보다는 약 20-30년 정도 뒤의 사회인데, 이 검안자료에는유학은 꽤 나오지만 한량은 잘 나오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는 "양인良人"이 나온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의 호적에는 양인으로.. 2025. 9. 8.
여덟분 조상 이름 전혀 모른다는 한량집 1850년대 이후의 호적을 보면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호적에는 유학幼學이 바글바글하며 유학이 이렇게 들끓는 시대에도 직역이 한량閑良으로 적힌 이들이 있다. 왜 이전에 유학 아래의 주호를 알리던 업무業武, 업유業儒 대신 한량이라는 직역이 이렇게 많이 쓰이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면18세기에 이 직역이 주로 서얼들에게 많이 쓴 직역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지만심증이라 자신은 없다. 아무튼 19세기 후반에는 업무業武나 업유業儒 대신 한량도 상당히 많은데, 이 한량 직역을 쓴 사람들 보면, 본인과 처의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 양쪽 4분, 도합 8분의 성함을 적는 난에부지不知, 모른다 라고 당당히 적어 놓고는 끝에는 다시 확인할 겸 양쪽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 8인 이름 모름이라한자로 떡 호적에다 써 놓은 경.. 2025. 9. 8.
1800년대 초반의 호적과 인구 앞에서도 간략히 썼지만, 1800년대 초반의 호적에는 실제 그 마을에 사는 사람의 1/3도 호적에 다 안 실려 있다. 이 호적을 모아 통계한 결과 인구가 700만이란 건데 호적의 부실함을 보면 이 인구가 놀랍기 짝이 없다. 필자가 보기엔 19세기에 이미 조선의 인구는 1500-2000만 정도에 확실히 육박해 있는 상태였다고 본다. 1800년대 초반의 인구를 정확히 추산할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시점의 관련 촌락에 거주 하는 모든 사람의 족보를 확보해서 거기 나와 있는 이들과 실제 호적에 등재된 사람을 대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이 힘을 받으려면동성집단이 많이 모여살았다는 것이 확실한 마을을 선택해야 한다. 필자는 약식으로 한번 시도 해 본적이 있는데, 19세기 초반의 호적 등재자는 실제 사람수.. 2025.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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