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19923 단장斷腸의 미아리彌阿里 고개 음반 Music Record, Heartbreaking Miari Pass 1956년 는 1956년에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이 노래한 곡이다. 미아리 고개에서의 이별을 주제로, 가사에는 북으로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미아리고개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 북쪽의 유일한 외곽도로였다. 이 길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피랍된 사람들이나 의용군으로 끌고 갔기에 창자를 끊어내는 고통을 말하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라 이름 붙였다. 따져보면 사연 없는 이 있으리오? 하나하나 켜켜한 역사의 온축蘊築이다. 그러고 보니 미아리를 彌阿里로 쓰던가? 그 미아리가 한때는 홍등가 대명사였고 또 한때는 생이별 현장이었다. 단장斷腸하던 미아리가 어찌하여 단장丹粧이 되었을까?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 화.. 2020. 5. 24. 서울탈환을 알리는 삐라 Leaflet Announcing Recapture of Seoul 서울탈환을 알리는 삐라 서울傳單 Leaflet Announcing Recapture of Seoul 1950년 일명 '삐라'로, 군사용 선전물이다. 앞면에는 "서울탈환 - 연합군과 국군은 수도해방"이라는 문구와 한반도가 그려져 있고 서울에 태극기가 꽂혀 있는 삽화가 있다. 뒷면에는 맥아더 장군이 서울을 탈환하여 공산군의 보급선이 끊어졌으며 끝까지 힘을 합쳐 공산군을 몰아내자는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에 전시 중이다. 2020. 5. 24. 그릇 강성대국 고구려, 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에 격발하여 긴잠 깬 올림픽공원 한성백제박물관이 《고구려와 한강》을 주제로 내건 특별전을 개막했다기에 얼굴 전면 대개비 기념해서 남영동 사저를 출발해 찾아나섰더랬다. 가서 본 소감을 일별한다. 1. 고구려는 그릇밖에 안만들었구나 그릇 가겐 줄 알았다. 박물관이란 간판 없었음 이 그릇 얼마예요 주문 넣을 뻔 했다. 온통 사방천지 그릇이었다. 왕뚜껑도 있고 짬지 공가서 오줌 싸는 오줌통도 있다. 2. 고구려는 그릇 강성대국이었다 얘들은 할 줄 아는 게 그릇 만들기밖에 없었나봐. 물론 가끔 철기 목기도 곁들여 놓기는 해도 저네들은 칠백년간 그릇만 만들다가 망했나봐. 3. 강성대국 고구려 그 힘은 그릇에 있었나봐 백제 신라보다 그릇이 쎗나봐 그릇치기 대회 했나봐. 그러다 막판에 인화문토기 앞세운 신라에 묵사발 났나봐. 안다.. 2020. 5. 24. 박주미가 묻힌 남양주 성묘成墓 광해군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1553~1577. 6. 13)라면 나는 퍼떡 박주미가 오버랩한다. 성묘 ★★★☆☆ · 역사적 장소 · 진건읍 송능리 산 55 www.google.com 그의 묘는 남양주에 있고 성묘成墓라 일컫는다. 한데 보다시피 품격이 완연히 왕릉이나 왕비릉의 그것이다. 여타 후궁묘와는 위엄이 현격히 다르다. 후궁묘가 저처럼 왕릉에 버금가는 이유는 딱 하나다. 왕을 낳은 여인인 까닭이다. 그 아들은 광해군이다. 한데 아다시피 그 아들은 폐위되어 군으로 강등됐다. 그러니 그 어미 역시 왕의 생모에서 여타 우수마발 같은 후궁으로 전락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가 보는 저와 같은 왕릉급 규모를 갖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저 무덤은 광해군이 왕이었을 시절에 조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에 .. 2020. 5. 24. 국립문화재연구소지 국립고고연구소가 아니다 한국 문화재 정책을 총괄하는 정부부처인 문화재청은 행정과 기획 조정을 중심으로 하는 까닭에 그 실무실행부서를 산하에 두게 되거니와, 정부부처 중에서도 차관급이라 기세가 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엿한 정부부처라, 번식본능이 있어 야금야금 사세를 확장하게 되거니와, 그 일환으로 그 산하에도 이런저런 기관을 속속 거느리기 시작했으니, 심지어 충남 부여에다가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라는 4년제 대학까지 설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물관도 한 곳이 있어 국립고궁박물관이 그것이라, 박물관이라는 이름 달았다 해서 국립박물관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하거니와, 전남 목포에다가 본부를 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도 실은 그 기반을 박물관에 두지만, 중앙박물관에서 하도 지랄을 하는 바람에 그 충돌을 피하고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라는 .. 2020. 5. 24. 비닐하우스, 제때를 선사한 농업혁명 순전히 우리 동네 기준으로 보면, 비닐하우스라는 신문물이 들어오기는 70년대 중반이다. 내가 왜 이걸 기억하는가 하면, 국민학생이던 그때 비로소 비닐하우스가 들어와, 내가 신기해서 구멍 뽕뽕 뚫었다가 엄마한테 부지깽이로 열라 얻어터졌기 때문이다. 이 비닐하우스는 말할 것도 없어 여러 모로 농업혁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이농 탈농현상이 극심화한 그 시절에 들어와서는 이제는 농업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기반시설으로 정착했다. 신기했다. 이 비닐하우스는 물론 대낮 기준이기는 해도 한겨울인데도, 그 안에는 그리 따뜻했다. 이럴 수 있냐 신통방통한 기억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비닐하우스 내부는 그 특유의 냄새 혹은 기운이 있다. 약간 텁텁한 그런 기분에다가, 지금 생각하니 공기가 통하지 않으니, 그에서 .. 2020. 5. 24. 이전 1 ··· 2415 2416 2417 2418 2419 2420 2421 ··· 332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