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무령왕릉》 출간 직전이었다. 해직 직후 할 일이 뾰족히 없어 떡본 김에 제사지내는 맘으로 그 옛날 원고 끄집어 내어 낸 것이 저 책이라는 말을 했으니, 그에 즈음해 이를 준비하는 과정을 sns 계정에다가 싸지르곤 했으니, 최종 원고를 넘긴 직후 느닷없이 서산군에서 일하다가 예산군으로 옮긴 학예연구사 이강열 군한테서 연락이 왔다.
이야기인즉슨, 가루베 얘기를 많이하시던데, 공주고보 그의 제자 분 중에 서산 대산중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김기풍(1923~2007)이라는 이가 계시는데, 그 분이 향토문화재를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대산중학교에다가 향토관을 만든 분이라면서, 그 분이 일찍이 이런 생각을 한 데는 아마도 가루베 영향이 아닐까 한다는 것이었다.
고뤠? 그렇담 그에 대한 정리된 글이 있는가 물으니, 이 군이 서산군에 재직하던 시절인지 아니면 그 이후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자신이 직접 이에 대해 조사하고 정리한 글이 있다고 하기에
그럼 보내지 뭘 하고 있어? 빨랑 보내!!!
하고는 시간의 촉박함을 들어, 그 자신의 글 중 관련 대목을 폰으로 찍어 카톡으로 받아 보니, 논급할 만한 내용이라 급히 저 졸저 제1장 '교사와 도굴꾼' 말미에다가 '가루베의 유산'이라는 작은 항목을 마련하고는 이 군의 연구성과를 인용했으니, 참 인연 치고는 묘하다 하겠다.
병은 소문을 내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요새는 글쓰는 환경도 더욱 일변해 내가 이런 주제로 글을 쓴다고 소문을 내면, 기대치도 못하는 자료를 만나는 행운이 왕왕 있다.
다만, 내가 직접 발로 뛰어 찾은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남이 제공한 자료는 애착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고, 나아가 인용인 까닭에 그 글을 인용한 이조차 기억에서 아련해지기 마련이거니와, 이후 나는 저 김기풍이라는 분을 잊고 지냈다.
그제다. 무심히 메일함을 열어 보니, 하마터면 스팸이라 해서 지워버릴 뻔한 편지를 무심히 열어 읽어보니 자신을 저 김기풍 선생 손자 김봉경 선생이라고 밝힌 분이 발신인이었다.
순간 김기풍??? 누구지??? 했다가 내용을 읽어보니 아차 그 분이었구나 했더랬다.
사신私信이라 그 내용을 전재해서 소개하지는 않겠지만, 요는 자신도 잘 모르는 할아버지를 소개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저 무렵, 저런 사실을 소개받고는 기회가 닿으면 서산 대산중학교 향토관을 둘러봤으면 했더랬다. 이래저래 어물쩍 흐물쩍 시간이 흘러 5년이 지났다.
서산이라면 나한테는 절친 대학 동창 J 고향으로 각인한다. 내가 이리 적어놓는 까닭은 물론 그에 얽힌 사연을 기록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꼭 저 향토관을 실견하리라는 다짐이라는 의미도 있다.
손자분에 의하면 김기풍 선생은 1955년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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