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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고총고분, 그 환상의 타파를 위하여] (3) 일본열도에서 퇴출되는 거대 무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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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를 갉아먹는 전방후원분 고총고분

 
나는 무덤 양식 변화가 단순히 유행 때문이 아니라,

또 무덤이 보수적인 것과는 눈꼽만큼도 관계없이,

그 시대 상황, 특히 국가 의지에 따라 변화했음을 계속 지적했거니와,

그 똑같은 양태가 실은 바다 건너 일본열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고고학에서도 주로 신라시대 적석목곽묘를 지칭할 때 쓰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에서 빌려온 싸구려 외국산 개념이지만

그런 대로 한국고고학 시대 구분을 논할 때 용이한 점은 없지는 않으니 
문제는 그 통합적인 이해다. 

예서 통합적인 이해란 논란이 없지는 않겠지만 동아시아를 하나로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지금의 국경이라는 개념을 없애고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말한다. 

이를 바라볼 때 이상하지 않은가?

그 명칭이 무엇이건 왜 일본열도랑 한반도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이른바 고총고분이 멸종했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나는 주로 정치 경제 관점에서 더는 묘지 쓸 땅이 없는 상황, 토지이용율, 국토 이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계속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일본은 어떠한가? 

한반도의 경우, 특히 신라의 경우 경주분지뿐만 아니라 넓게 잡으면 3~6세기, 좁게 잡으면 4~6세기 공동묘지 중심 고총고분이 집중으로 등장하다가 이후 아예 그런 흔적은 종적을 감추고 만다. 

고고학이라는 관점에서, 특히 무덤고고학이라는 관점에서 대단히 특이한 시기가 7~10세기 어간이라,

좁게 잡으면 8~10세기는 무덤이 안보인다! 


고총고분시대 권력자의 무덤

 
물론 아주 안 보이겠는가? 다만 그 이전 시대랑 견주어 저 시대는 실상 무덤 공백지대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지는가를 고고학은 물을 생각도 없었고 묻지도 않았다.

왜?

무덤 껍데기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어떤 모양새에서 어떤 모양새로 변해갔다는 데 관심이 있으니,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빚어졌은지,

더 간단히 말해 한국고고학은 why를 물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신라 고고학의 경우 여러 모로 지증왕 시대가 관건이라,

이를 고비로 순장이 금지되고,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제는 더는 경주분지에는 무덤 쓸 땅이 없어져 외곽으로 무덤이 뛰쳐나간다. 

이를 도시발달 혹은 국가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많이들 접근하지만 천만에.

그런 까닭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전 시대부터 누적한 묘지墓地를 더는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묘지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고고학 발굴양상을 볼 때 늦어도 7세기에 들어서서는 삼국 공히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으니, 묘지가 너무 많은 국토를 잡아먹었다.

그래서 이를 타개할 방법들을 권력이 고민하게 되는데

종래와 같은 수 백기 수천 기가 한 군데 등장하는 공동묘지가 일시에 실종되게 된 것은 이 국가 권력의 개입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기록이 없다?

웃기는 소리.

기록이 왜 없어?

전국 무덤 발굴 양상 보면 답이 딱 하니 나오는데 그것이 기록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의 경우 고총고분이 대표하는 이른바 고분시대는 실상 7세기면 막을 내린다.

이 시기가 되면 고총고분 흐름을 이끈 이른바 전방후원분이 일시에 사라지며, 그에 따라 무덤도 코딱지 만해진다.

왜?

더는 무덤 쓸 땅도 없다. 

무덤이라 하니 그 무덤 덜렁 하나만 생각하기 십상이나 천황 같은 권력자가 묻힌 무덤은 그 일대가 온통 토지이용 규제를 받는다.

침전이 있고 주변엔 능시가 있으며, 그런 데가 많아지니 이제 더는 그런 땅 확보도 쉽지 않은 시대에 돌입했다. 

무덤 하나 쓰려면 대규모 토지매입을 해야했고, 그에 따른 막대한 보상비가 지출됐다.

국가 재정이 이젠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시대 마침내 국가가 칼을 빼 든다.

대화大化 2년, 서기 646년 이른바 박장령薄葬令이 발동된다.

그 이전 힘 있고 돈 있는 놈들은 무덤을 크게 크게 지었지만 이를 더는 용납할 수 없어 신분별 계급별 무덤 규모를 한정했으니,

박장령이라 하지만 그 대요는 묘지 축소에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에 따라 무덤은 王 (皇族) 以上,上臣 (大臣) ,下臣 (大徳·小徳) ,大仁·小仁,大礼~小智,庶民 (無位者) 의 6단계로 나뉘어 무덤 규모를 한정하게 된다. 

안 보이는가?

이 박장령이?

이 박장령이 왜 나왔겠는가?

이런 박장령이 왜 신라에서 나오지 않았겠는가?

저 박장령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탈락한 바로 그 박장령이다. 

신라에서 저 제도는 먼저 시행됐다. 

기록에 없어?

없긴 왜 없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가야 신라 고구려 백제가 나와야 그 일본서기가 한국사 문헌인가?

웃기는 소리다. 

일본서기 전체가 한국사 문헌이다. 



정리한다.

묘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신라는 지증왕 법흥왕 무렵에 묘지령을 발동한다.

이 묘지령에 따라 대규모 공동묘지가 사라지고 무덤 규모 또한 현격히 작아진다.

수 만 기 수십 만기 무덤을 파헤치고도 한국고고학은 이걸 몰랐다.

왜?

Why를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 previous articles *** 


 
[고총고분, 그 환상의 타파를 위하여] (2) why를 궁구하지 않는 학문
 
[墓와 廟] (1) 고총고분 등장이 권력자 등장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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