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권 제90 열전 권 제3 종실宗室에 실린 고려 현종 아버지 왕욱王郁 행적은 다음과 같다.
(태조 왕건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王郁은 살던 집이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있었는데 경종景宗 비妃인 황보씨皇甫氏 사제私第와 가까웠다.
경종이 훙서하자 비는 〈대궐을〉 나와 그 집에 살았는데 왕욱과 더불어 드디어 불륜해서[烝] 임신하게 되었다.
일이 발각되자 성종成宗은 왕욱을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 보내며 일러 말하기를,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 가게 되었으니, 삼가 애태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내시알자內侍謁者 고현高玄에게 명령하여 압송하게 했는데, 〈고현이〉 돌아가게 되자 왕욱이 시를 지어 주어 이르기를,
“그대와 함께 같은 날 서울[皇畿]을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여함旅檻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가 사슬에 묶인 듯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서 돌아보며 나는 듯 하는 말을 부러워하네. 제성帝城 봄빛에 혼이 되어 꿈속에서 오가고, 나라의 풍광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다. 성주聖主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끝내 물고기 잡는 갯가에서 나이 들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처음 왕욱이 유배되어 있을 때 황보씨가 몸을 풀다가 죽자, 성종은 유모乳母를 뽑아 아이를 기르게 하였다.
아이가 두 살이 되자 유모가 늘 그에게 ‘아빠’라는 말을 가르치곤 하였다.
하루는 성종이 아이를 불러서 보았는데, 유모가 안고 들어가자 아이는 성종을 우러러 쳐다보며 아빠라고 불렀다. 무릎 위로 기어가서도 옷자락을 붙잡으며 또 다시 아빠라고 불렀다.
성종이 불쌍히 여겨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를 몹시도 그리워하는구나!”라고 하고, 드디어 아이를 사수현으로 보내어 왕욱에게 돌려주었다. 이 아이가 현종顯宗이다.
왕욱은 문사文辭가 정교하고 또 지리에도 정통했다.
일찍이 몰래 금金 한 주머니를 현종에게 남기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술사術師에게 주어서 이 고을 서낭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나를)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여라.”고 했다.
성종 15년(996) 왕욱이 유배지[貶所]에서 죽으니 현종은 그의 말처럼 장차 장사지낼 때 엎어 묻어달라고 요청하니, 술사가 말하기를, “뭐가 그리 조급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이듬해 2월 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왔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왕욱을〉 추존(追尊)하여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안종安宗이라 했다.
〈현종〉 8년(1017) 4월에는 건릉乾陵으로 이장하고, 5월에는 시호諡號에 헌경(憲景)을 덧붙였다.
〈현종〉 12년(1021)에는 효목을 고쳐 효의孝懿라 했으며, 〈현종〉 18년(1027)에는 시호에 성덕聖德을 덧붙였고 뒤에 〈능호陵號를〉 무릉武陵이라 일컬었다.
安宗郁, 居第在王輪寺南, 與景宗妃皇甫氏私第近. 景宗薨, 妃出居其第, 郁遂烝有身. 事覺, 成宗流郁泗水縣, 謂曰, “叔犯大義, 故流之, 愼勿焦心.” 命內侍謁者高玄押送, 玄還, 郁贈詩曰,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初流郁之日, 皇甫氏免身而卒, 成宗爲擇傅姆養其兒. 兒至二歲, 姆常誨之曰爺. 一日成宗召見, 姆抱以入, 兒仰視成宗, 呼云爺. 就膝上捫衣襟, 又再呼爺. 成宗憐之, 下淚曰, “此兒深慕父也!” 遂送泗水以歸郁. 是爲顯宗. 郁工文辭, 又精於地理. 嘗密遺顯宗金一囊曰, “我死, 以金贈術師, 令葬我縣城隍堂南歸龍洞, 必伏埋.” 成宗十五年, 郁卒于貶所, 顯宗如其言, 將葬請伏埋, 術師曰, “何大忙乎?” 明年二月, 顯宗還京, 及卽位, 追尊孝穆大王, 廟號安宗. 八年四月, 移葬乾陵, 五月, 加號憲景. 十二年, 改孝穆爲孝懿, 十八年, 加聖德, 後稱武陵.
고려 제5대 경종景宗(955~981) 왕주王伷는 광종과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사이에서 난 맏아들이니. 태조 왕건 손자다.
975년 아버지 광종이 죽자 스물한살에 즉위해 불과 6년 만인 981년에 사망하니 스물일곱 살이었다.
다음 보위는 왕세자가 어려 경종의 사촌아우 왕치王治한테 가니 이가 훗날 성종成宗이라 일컫게 된다.
성종이 왕욱을 일컬어 숙부라 부른 이유가 이 때문이다.
보통 후임 왕이 즉위해도 앞선 왕 마누라는 태후가 되어 왕궁에 머무르지만 경종비 황보씨는 여러모로 불편하다 생각했는지 왕궁을 떠나 사저로 퇴거했다.
이 과부 왕비가 몇살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남편 경종이 스물일곱에 죽은 것으로 보아 이십대 중후반 한창 들끓는 청상과부였음에는 틀림없다.
한데 마침 그 사저가 왕욱이 사는 집과 가까운 게 문제였다.
뭐 볼짝없이 왕욱이 과부가 된 조카 며느리 위로한답시고 아이고 이를 우째요 마음 굳게 잡수시고 수작하다 그만 찌릿찌릿 전기가 통해 몸까지 섞게 되니 그것이 기어이 임신으로 탄로나고 말았다.
당시 근친혼이 극심했으니 언뜻 이것이 왜 문제인가 하겠지만 그에서도 금도가 있었으니 선왕의 비가 다른 잠자 씨를 벨 수는 없었다.
피임만 잘 했어도..
그 어미 황보씨는 아들을 낳다 죽었다. 산후조리 문제인지 뭔지 확실치 아니하나 아무튼 죽으니 여러 복잡한 문제가 해결됐다.
이렇게 해서 기적적으로 태어난 이가 훗날 왕까 되었으니 역사란 참말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고려현종 #왕욱 #불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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