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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곤조] 나는 실제로 선행연구성과를 안 읽는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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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는 방식이 모든 사람한테 통용할 수는 없음을 잘 안다. 그런 까닭에 내 방식을 강요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매양 말하듯이 논문이 논문을 양산하는 시스템을 경멸한다. 예서 말하는 논문이 논문을 양산하는 시스템도 내실에 따라 갈라야 하는데, 내가 말하는 그것은 남이 애써 쓴 연구성과를 결론만 바꾸어 그것을 논문이랍시도 싸지르는 짓거리를 말한다. 그런 논문은 물타기에 지나지 아니한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보는 한국 논문 10편 중 9편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한국고대사 분야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이런 짓거리가 지명 비정 논문이다.

반면 내가 장려하거나 상찬하는 논문이 양산하는 논문이란 나의 내적 확대를 말한다. 이건 외우 신동훈 교수도 계속하는 말인데, 논문은 쓸수록 논문거리가 양산하기 마련이라, 나는 논문 쓸 거리 주제가 없다는 푸념 용납할 수가 없다.


원전으로 승부하라.



문화사만 해도 내가 보건대는 쓸 게 너무 많다. 널부러진 것이 논문거리인데 무슨 논문 쓸 거리가 없다는 말인가?

이는 사고하지 않아서이며, 회의 의심하지 않아서다. 간단히 말해 공부를 한다 하나 진짜 공부를 하지 않아서다.

각설하고 나는 남의 논문들 읽고서 그 논문을 토대로 내 주장을 펴는 일 증오하며 경멸한다. 왜 남의 논문을 기초해 내가 그것을 보강하거나 수정하거나 하는 글을 쓴단 말인가?

그런 글은 영원히 내가 그 따라지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그런 글을 경멸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김태식이고 싶지, 누구를 보강하거나 수정한 김태식이고픈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가 미쳤다고 남의 따라지, 시타바리가 된단 말인가?

예컨대 A라는 주제에 대한 다른 사람 논문들이 있다. 그 논문들을 읽고서, 내가 생각하는 바를 곁들여서 그것들을 분석하고, 비판한 글들로 새로운 글을 쓴다? 

그건 그 선행연구성과를 제출한 사람들에 대한 따라지가 되는 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또 매양 말하지만, 선행연구성과 검토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들을 무시하자는 맥락으로 비칠 수도 있겠고, 또 내 직설과 언설이 달라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측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참에 분명히 해 두건대 내가 그들을 무시하자는 맥락을 뛰어넘어 나만의 목소리를 내라는 그 의미에 방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국내 학술계 글쓰기 양태에서 논문 서두에 그 글이 무엇을 주제로 삼는지를 설정한 다음에 곧바로 선행연구성과 검토로 들어가서  그 주제에 대해 누가 언제 어떤 글에서 어떤 요지로 주장했다는 이 잡다스러함을 경멸하고 증오한다.

왜 그 딴 코너를 별도로 독립해서 내 주옥 같은 글을 어지럽힌단 말인가? 

필요없다. 내가 미쳤다고 남의 따라지가 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꼭 그렇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선행연구성과 일부러 피한다. 내가 미쳤다고 남들 얘기를 신경쓴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

나는 이른바 철저한 원전 출발주의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예로 들건대, 내가 그것으로 승부해야지, 왜 미쳤다고 이병도를 통해, 이기백을 통해, 김창겸을 통해 내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본단 말인가?

아 물론 교주본 역주본은 당연히 내가 중시한다. 그에서 무슨 주장이 나왔는지를 내가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철저히 나는 이른바 원전을 대면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 원전들을 독파함으로써 내 스스로 문제의식을 유발해야지 미쳤다고 내가 저들한테 얽매인단 말인가?

이것이 내 곤조이며, 그런 곤조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한테는 원전과 그 교감본과 그 역주본 정도가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고고학 자료 역시 마찬가지라, 나는 그 연구논문 안 읽는다. 읽고싶은 생각도 없다. 어차피 쓰레기인 것도 있지만, 내가 미쳤다고 그네들 방향을 따라 그것을 따르고 피하고 한단 말인가? 그건 내가 그들의 따라지가 되는 일이다. 

내 공부 출발과 귀향점은 언제나 발굴보고서다. 물론 그 보고서에도 보고자 관점이 짙게 투영되기 마련이지만, 그것은 실록이기에 그 이면을 보려 언제나 노력한다. 

그렇다고 아주 선행연구성과를 안 보는가?

본다. 언제 보는가? 내 글을 쓰고 난 다음에 본다. 그러고서 비로소 그 인용해야 할 곳들을 적출해서 적절히 표시한다. 

그 결과 예컨대 이런 경우가 생긴다. 내가 이런 결론을 도출했는데 선행연구성과에서도 그와 비슷한 결론이 있다면? 

그때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각주에 표시한다. 내가 도출한 결론은 누구의 주장과 흡사하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 선행연구가 나에 견줄 만큼 훌륭하다는 뜻이지 내가 그의 주장을 따른 것이 아님을 표식하는 곤조다. 

비근한 사례로 무령왕릉 묘권墓券에 보이는 등관대묘登冠大墓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나는 등관이라는 지명의 백제 왕가 공동묘지라는 결론을 도출했는데, 등관을 고유명사라고 주장한 사람이 이미 있었다. 그런 주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왜? 보고서에 그리 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등관을 나는 고유명사로 확정했는데, 그건 대묘 라는 말을 의미를 해체하고 나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대묘가 공동묘지로 드러나니, 등관은 지명의 고유명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논문을 제출했더니 심사자가 누구 의견을 그대로 따랐는가 하고 힐난 조 평을 쓴 대목을 보았지만, 이는 그 친구가 단단히 내 의도를 일부러 오도한 것이다.

그 선행연구가 어찌 감히 내 주옥 같은 글과 비교되며, 어찌 내 주옥 같은 글이 그의 따라지 글이 된단 말인가? 이는 나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그의 따라지가 될 생각도 없다. 그를 무너뜨리고자 한 글이 그 논문이었다. 실제 그는 대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까막눈이었다. 

나아가 저와 같은 곤조가 있기에, 나 역시 이른바 학회지가 요구하는 격식에 맞추려 할 때는 그 양식을 되도록 존중하려 하지만, 대체로 선행연구성과 검토라는 항목이 거의 없다. 왜 없는가? 내가 그들을 무시해서인가?

천만에. 내 얘기를 하고자 하는 글에 내가 미쳤다고 그들을 대문으로 삼아 내 얘기를 펼쳐간단 말인가?

소위 선행연구성과들은 본분에서 모름지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다가 배치할 뿐이다. 그래서 선행연구성과 검토라는 항목을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취리산 회맹에 관한 내 논문을 보면 이 선행연구성과 검토라 부를 만한 대목이 없지는 않은데, 논문 맨 말미에다가 몇 편만 배치했다.

이것이 내 곤조다. 
 
#논문쓰기 #선행연구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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