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말기-해방정국을보면, 당시 국제정세를 보는 수준이 이승만이 매우 높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이승만을 폄하하는 측 입장을 보면, 이승만이 미국 입장을 대변하여 남한 단독 정권 대통령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승만의 당시 활동의 수준은 그런 정도 레벨은 아니라는 것을 공개되는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승만의 경우, 국제정세의 판단이 매우 정확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향후 정국 예측이 매우 뛰어났다.
이승만이 2차대전 발발 전에 저술한 "Japan Inside Out"이라는 책이 진주만 기습을 예언했다 하여 상당한 반향을 미국에서 불러 일으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대전말기-해방정국에 이르면 단순히 국제정세를 예측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를 자신의 의도 대로 그 흐름을 바꾸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카이로 선언 이후 집요하게 전개된 신탁통치에 대한 루머에 대한 대응, 그리고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종결하는 단계에서 보여준 "외교 곡예"가 이에 해당한다.
이승만은 이러한 결정적 상황에서 판단이 상당히 정확했고 이를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종결짓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정세에 대한 판단이 이승만을 단순한 신생독립국의 대통령 이상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할 수 있다.
카이로선언은 사실상 2차대전 이후 한국의 독립을 결정지은 결정적 계기로서 일제식민지시대 있던 모든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만 한데, 이 선언이 나왔을 때 이승만 반응을 보면 당시 그가 얼마나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은 대전이 종식되기 상당히 이전에도 이미 종전 후 미국과 소련간에 냉전이 시작될 것을 예측하고 행동한 정황이 많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카이로 선언 (1943년 11월) 이후 이승만이 주중 미국대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한국의 장래의 지위에 관하여 워싱턴에 가있는 한국위원회의 이승만 씨가 나에게 보내온 10월 18일[4]자 서한의 사본을 동봉합니다.
이승만 씨는 소련 극동군 일부가 소련 정부에 의해 훈련되고 보급된 한국인 집단으로 이루어졌으며, 결국에 소련에 의하여 한국을 침공하고 소련에 가맹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그곳에 수립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현재 중경에 있는 이른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나(주중 미국대사: 필자 주)는 소련이 대일전쟁에 가담하게 되면 현재 시베리아에 있는 한국인 사단이 한국 침공에 사용될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그들간에 끊임없이 논쟁을 거듭하고 있는 직업적 혁명가들의 이른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이승만 씨가 예측하는 사태를 방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승만 씨에게 회답은 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위키에서 전재)
여기서 언급한 소련 극동군 일부에 존재하는 한국인 집단이 소련이 참전했을 때 선두에 서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실제로 되었다.
이 한국인 집단이 속한 부대가 바로 동북항일연군이 소련으로 피신해 만들어진 소련군 지휘하의 "제88독립보병여단"이다.
만주의 동북항일연군 당시에는 휘하의 150-30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던 중간 지휘자급이었던 김일성은 이 시기가 되면 이승만이 언급한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때 선두에 설" 집단의 지휘자가 되어 있었다.
카이로선언이 1943년 11월에 나왔는데 종전 훨씬 전에 이미 이승만은 한반도가 냉전의 대결장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 셈이다.
재미있는것은 이승만이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소련의 참전도 먼 훗날의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 한반도를 둘러싼 소련과 미국의 냉전국면을 이 정도로 정확히 예측한 한국인은 이승만 혼자였을 것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아니, 미국에서 조차 1943년 11월에 종전 이후 냉전의 가능성까지 보고 있었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이승만은 카이로선언부터 일본의 해방에 이를 때까지 당시 전쟁의 전개, 그리고 종전 후 독립까지 이르는 상황에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각축장이 될 것임을 이처럼 상당히 정확히 예측하였는데 이러한 정세분석의 면밀함이 결국 이승만과 김구의 해방정국에서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해방정국에서 세계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인 중 하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나름 국내 최고의 재사를 자임하던 여운형이 해방정국에서 벌인 건준-인공이라는 해프닝을 보면, 당시의 한국 (조선) 지식인의 수준과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데,
북한 정권을 차지한 김일성조차 이승만 정도의 국제적 정세의 판단이 될 때까지 성장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1960년대가 되어서야 김일성이 비로소 제대로 된 국제정세 판단이 가능해졌다고 본다).
해방이후 냉전질서로 재편되는 단계에서 한국인은 이에 무신경하게 편승하거나 아니면 저항하되 그 흐름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승만은 이 상황에서 몇 차례 매우 중요한 국면에서 이를 신생 대한민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흐름을 반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마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1970년대 남베트남과 함께 지도상에서 지워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필자는 본다.
이승만이 얼마나 대단한 "정치가"였던가 하는 점은 지금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그가 1950년대에 깔아 놓은 열차선로를 따라 달리고 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승만은 해방정국 당시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국제적 수준의 "정치가"의 레벨에 도달하여 미국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의 움직임을 가장 객관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다.
P.S.1) 이승만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터이니 이승만이 잘했네 아니네 따지는것은 이 글을 쓴 의도가 아니다.
해방정국을 설명한 글을 보면 이승만을 미국 뒤꽁무니다 따라다니는 기회주의자로 묘사하는 글이 많아 이에 대한 반박을 할 겸 쓴 글에 불과하다.
이승만은 좋은 의미에서건 아니건 간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범이다. 또 해방정국에서 한국인 정치가들 중 가장 높은 단게에서 당시의 시국을 바라보고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그 흐름을 바꾸려고 한 사람이었고, 실제로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해방 정국 당시 조선땅 그 누구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가 욕 먹을 부분도 많을 것이다. 다만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그의 개인적 능력을 빼고는 정확히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점에서 모든 칭찬과 비난의 첫부분은 이승만의 이러한 능력에 대한 긍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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