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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근대 일제'를 몰아낸 참상에서 자란 독버섯들

by taeshik.kim 2024.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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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가 농경지 농수 공급을 위한 저수지 제방인가, 아니면 바닷물 침수를 제어하기 위한 수갑水閘, 곧 dock인가 하는 논쟁이 대대적으로 붙은 적이 있었다.

내 기억에 후자를 제기한 이는 일본인 고고학도 아니면 농업고고학도였을 것이며 그에다가 제대로 불을 붙인 이는 한국에서 농업경제학도 이영훈이었다. 

이 논쟁은 선후관계는 내가 지금 기억에 의존하는 까닭에 자신이 없는데 느닷없는 만경평야 논쟁으로 발전해 다시 이영훈은 느닷없이 소설가 조정래를 끌어들여 두 사람이 대판 맞붙은 일대 논쟁으로 비화했다. 

이 벽골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만경평야 문제도 결단 나니 그 논쟁이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었으니,

나는 이 논쟁이야말로 21세기에 벌어진 제대로 된 논쟁 중 하나로 본다.

물론 양측은 감정싸움으로 발전해 서로에 얻는 이득이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 논쟁은 그만큼 내가 보는 한 치열했고 그래서 나한테는 논쟁다운 논쟁으로 각인한다. 

그렇다면 무슨 만경평야 논쟁이며, 더구나 그것이 왜 벽골제랑 연동하는가?

벽골제를 농경지 제공용 저수지로 본다면 우리한테 익숙한 저 만경평야가 전근대에도, 그러니깐 늦어도 조선시대에는 그런 풍광이 펼쳐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암튼 이영훈에 의하면 우리가 보는 지금의 만경평야는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그 간섭이 본격화한 구한말 이래 근대적인 수리조합 탄생 이래 가능한 경관이며 그 이전에는 상습 침수 황무지에 지나지 않았다면서,

그럼에도 조정래는 이런 사실을 호도한 채, 혹은 그런 사실에 무지한 채 저 광활한 만경평야를 어느날 날강도 일본제국주의가 나타나서 다 강탈해갔다는 신화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구체로 그가 지적한 조정래 소설은 아리랑이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대규모 수리 통제는 전근대에는 있을 수 없다.

고작 전근대에 할 수 있던 일이라고는 청계천 준설 정도밖에 없었으며, 그거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해 조선왕조는 빌빌 쌌다.

전근대 우리네 수리 통제 기술이 고작 그것이었고 저 이상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한강 내륙수운에 방해가 되는 암벽 여울이 양평인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언제나 사고를 일으켜 골치 아파했거니와, 그 암반 하나 제대로 뚫지 못한 조선왕조다.

현종 때인가 뚫었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내 보기엔 뚫은 시늉만 냈다. 고작 그 수준이었다. 

태안 난행량이 걸핏하면 선박 침몰사고를 일으켜 그거 하나 해결하겠다고 조선 왕조가 국력을 총투입해 운하 하나 뚫겠다고 국운을 걸고 나선 때가 조선 태종 때다.

하지만 실패했다.

왜?

기술이 그것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물을 통제할 만한 수준이 그것밖에 안됐기 때문이다. 

한데 그렇게 꿈꾼 물을 통제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언제?

그래 일제가 그리 싫다면 구한말이라고 하자.

암튼 빠르면 구한말, 늦어도 식민지시대가 본격 개막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물을 통제하는 시대로 돌입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물이 어떻게 완전 통제되리오?

중요한 것은 물이 통제 가능함을 본격으로 보여준 시대가 식민지시대였음은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내셔널리즘이 어찌 이를 용납한단 말인가?

감히 일제가 단군할아버지도 못한 일을? 그렇게 좋은 일을?

이 내셔널리즘은 그리하여 팩트조차 조작하면서 식민지시대를 뛰어넘는 저 조선시대, 더욱 구체적으로 조선후기를 찾아서 득달같이 달려나가기 시작해 그에서 근대의 시발을 찾았으니 그것이 바로 실학이었다. 

이 실학이야말로 일제가 침략과 함께 가져온 근대라는 씨앗을 스스로 키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며, 조선후기 상업발달론도 그렇게 해서 어거지로 나온 것이다. 

저 근대라는 달콤한 씨앗을 일제가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이 윽박이야말로 한국사를 뒤틀리게 한 일대 독버섯이다. 

인간에 의한 수리통제가 가능함을 증명한 것은 식민지시대였다.

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 바로 평야의 등장이었다. 

만경평야? 김포평야? 김해평야? 

우리가 아는 그 가을이면 나락이 풍성히 익어가는 그 광활한 평야는 근대가 준 축복이었다. 

물론 조선시대라 해서 호남이, 김포가, 김해가 곡창 지대 비슷하게 인식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그 곡창이 우리가 아는 저 평야는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산지가 적고 평지가 많은 까닭에 상대적으로 농사 지을 만한 땅이 많았을 뿐

또 그것 하나로도 여타 산간 지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농업생산성을 누린 것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함이 없지만

그렇다 해서 저 광활한 평야가 그 시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가 싫다고 없는 역사까지 조작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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