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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김유신, 태대각간에서 흥무대왕으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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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덤이 김유신묘인가 아닌가는 논란이 적지 않다. 그것은 차치하고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조선후기, 아마도 영조연간이던가? 그때 세운 묘표墓表에 이 무덤을 일러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 태대각간 김유신묘)'라고 했다는 점이다. 왜 흥무대왕릉興武大王陵이라 하지 않았을까? 이미 김유신은 그 시기를 확정하긴 곤란하나, 신라말기에 흥무대왕에 추봉된 이래 줄곧 흥무대왕이었으며, 특히 김해김씨 종문宗門에서는 더 그랬다. 그럼에도 대각간 김유신묘라고 한다. 이 점이 수상쩍기만 하다. 


김유신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된 시기는 언제인가? 

내가 일전에 이를 정리한 적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 흥덕왕代(826~836)

삼국유사 : 경명왕代(917~924)

삼국사절요 : 경명왕 7년(923)

동국통감 : 흥덕왕 10년(835)

동사강목 : 흥덕왕 10년(835)


이 정리에 바탕한 관련 내 논고가 「김유신의 흥무대왕 추봉시기」 (『신라사학보』 6, 신라사학회, 2006)가 그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쓸 때까지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물론 내 조사가 철저하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지만 


저런 아주 평범한 팩트 정리조차 학계에서는 이뤄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흥무대왕 추봉시기를 저리 정리하기는 내가 처음이다. 




흥무대왕 추봉시기가 문헌에 따라 저리도 다양하게 나온다는 것 자체도 몰랐다. 

고작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르다는 정도만 확인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왜 이랬을까? 

절요와 통감, 그리고 동사강목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이들 후대 세 사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기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보완하는 의미 정도로 훑었을 뿐이다. 


흥무대왕 추봉시기를 둘러싼 저런 차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시해야 할 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아니라 외려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이다. 


신라 대각간 김유신묘



그 선대 문헌들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특별한 해year를 지칭하지 않으면서 '흥덕왕 재위 시대' 혹은 '경명왕 재위 시대'를 거론한데 반해  절요는 경명왕 재위 7년(923), 통감은 흥덕왕 10년(835)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그 근거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현재 우리한테 주어진 자료로는 더는 추적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까지 혹 《구삼국사舊三國史》가 남아있었거나, 혹은 《수이전殊異傳》 같은 지금은 일실逸失한 문헌이 남아있었을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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