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일 ‘남한강 유역의 교통로’에 대한 토론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2016.5.20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된 '남한강 유역 폐사지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를 위한 1차 학술대회' 토론문이다. 당시 나는 해직기자였다.)
원주 일대 절터를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문화유산을 엮어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면 하는 바람은 내 기억에 대략 최근 몇 년 사이에 이곳저곳에서 제기되기 시작했고, 그런 움직임을 불러 일으킨 사람 중에는 토론자도 끼어있다고 본다.
내가 애초에 그에 착목한 까닭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인근 여주 고달사지를 포함해 오늘의 주인공들인 원주 일대 절터들을 갈 때마다 너무나 내가 감흥을 받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런 연계성도 없이 따로 노는 까닭에 그런 점들이 안타깝기만 했으며, “이 좋은 곳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일단 그리 생각하고 보니, 그림이 그려질 듯도 하다는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되었다. 이들 절터가 극성을 구가하던 시기가 공교롭게도 신라 말~고려 초기로 몰려있는 데다가, 이를 가능케 한 주축들이 모두가 공교롭게도 당시로서는 신흥 종교 운동을 대표하는 불교 승려들로써 하나 같이 왕실에서는 왕사(王師) 혹은 국사(國師)로 임명되어 중앙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나아가 현존하는 유적 유구로 보아도 더욱 공교롭게도 이들 왕사 국사를 봉안하고 기린 시설들이 사찰 한 쪽 구역, 더욱 정확히는 그 북쪽 후미진 곳이지만, 한 눈에 전체 사역(寺域)을 조망하는 곳에 조사당이 확연히 드러나니, 이들이 곧 불교 교주인 석가모니 부처에 대응하는 현세의 불국토 주인이라는 생각도 떠올라 이들 조사당을 나는 절 안의 또 하나의 절이라는 뜻에서 ‘사내사(寺內寺)로 부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바람들이 막상 ‘바람’을 떠나 오늘과 같은 자리로써 ‘구상’의 단계에 접어들자 한편으로는 겁이 나기도 했다. 애초의 생각들은 막연하기만 할뿐이요,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고자 할 때는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더욱 세밀한 학문적 접근과 분석이 필요하다. 낱알로 따로 노는 구슬은 꿰어야 보석이 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과분하게 토론을 맡은 서영일 원장의 발표는 그런 ‘막연한 바람’에 연무를 걷어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준다. 발표자는 단국대 박사학위 논문인 《신라 육상교통로 연구》 이래 줄곧 인간의 역사에서 교통로가 왜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설파하는 활동에 종사한다.
그 물질적 증거 확보라는 측면에서 그가 투신한 고고학은 또 다른 측면에서 그런 활동에 유리한 공간을 조성해 준다고 나는 본다.
더구나 발표자는 파주 혜음원이라는 고려시대 왕립 호텔을 겸한 역원 시설 발굴조사를 오래도록 하는 사람 아닌가? 院 시설이 갖는 중요성은 이번 발표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표문을 죽 훑어보면 단박에 드러나지만, 오늘의 주인공들인 원주 지역 절들을 발표자는 인문과 자연과 지리의 삼박자라는 관점에서 두루 섭렵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발표자는 이명박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이른바 사대강 사업 중에서도 한강 유역 조사의 주관 기관 대표자로서, 오늘의 주제인 지역들을 그야말로 배를 타고 다니며 암벽과 강바닥까지 훑고 다닌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이 거대한 암벽이 병풍처럼 두른 흥원창지와 남한강 너머로 지는 장대한 낙조를 바라보며 넋을 잃을 때, 그들 암벽에 조선시대 묵객들이 남긴 각석(刻石)을 보아야 한다고 주문한 이가 발표자다.
오늘의 발표에서 발표자는 사실 절터들을 한데 아우른다는 관점에서 절터 그 자체들보다 더욱 큰 그림을 제시하고자 했으니, 그것이 바로 흥원창이라는 조창이다.
이 흥원창을 요새 드론을 띄우듯 원주 하늘에 띄워놓고 한눈에 조망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을 하나로 꿰는 거대한 꾸러미가 실은 남한강이다.
나는 이 점을 감히 평가하건대 오늘의 여러 발표 중에서도 가장 값진 성과 중 하나라고 본다.
더불어 발표자는 같은 맥락에서 충주 지역에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고려시대 덕흥창을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덕원창과 흥원창은 고려시대 국가 물류 시스템의 근간인 12조창 중 한 곳들을 당당히 차지한다.
덕원창을 주목한 이번 발표문은 실은 원주 지역 이외의 관련 유산과 연계성이라는 문제가 대두할 때 그 가장 강력한 후보지 중 한 곳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주시해야 한다고 본다. 쉽게 말해 원주와 충주를 연계한 세계유산 등재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번 발표문에서는 그런 점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아쉬움을 주지만 발표자는 고려시대 사원을 그 지역 경제센터로 보는 사람이다.
이런 점들은 발표자 외의 다른 선행 연구성과로 보충되거나, 추후 이런 자리들을 통해 더욱 보강되고 이들 문화유산을 부각하는 ‘무기’로써 활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데 이에서 드러나는 문제점 혹은 한계도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물류 경제 혹은 교통로라는 관점에서 법천사를 필두로 하는 원주 지역 절터들을 연계유산으로 묶는다고 할 때, 그 최대 강점인 흥원창은 실은 최대 약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흥원창은 그 자리로 전하는 곳에 표지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고, 실은 그 실제의 면모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토론보다는 감상이 되어버린 이번 토론에서 나는 발표자에게 오직 이와 관련한 질문들만 하고 싶다.
첫째, 흥원창지는 지하에 남아있겠는가? 둘째, 발표자가 그 발굴 책임자라면 그것을 찾아낼 자신이 있겠는가? 셋째, 그것이 혹시라도 발굴을 통해 드러났을 때, 이것과 주변 지역 절터 유산들을 어떻게 연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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