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동경은 등때기에 둘러맸지 가슴팍에 걸친 것이 아니라는 내 주장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3. 24.
반응형
동경은 등에다가 그것도 비추는 면을 밖으로 드러낸 상태로 둘러맸다! by 여씨

 
나는 줄기차게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 

그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동진시대 도사 갈홍 저술 포박자抱朴子에 보이는 기술이었으니

그에서 갈홍은 선경仙經이라는 지금은 망실한 도교 옛 문헌을 인용하며 이르기를 

"옛날엔 동경은 등에 울러맸다"
고 했거니와,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야 한다.

첫째, 동경은 본래 도교에서 법구法具로서의 기능이라는 측면에서 본래는 등에 울러매서 사용했다는 것이 그것이며 

둘째 그것이 옛날에는 그러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갈홍 당시에는 그 착장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본래하는 착장 방식은 근간이 등에다가 둘러매는 것이었지 결코 가슴팍에 걸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경산 양지리 목관묘는 도교 혹은 그 원류로서의 신선사상에 대한 이해없이는 료해了解 불가다. 도교를 알아야 그것이 제시하는 풍부한 콘텐츠 전개가 가능하다.

 
그것이 시대가 흘러 동경을 착장하는 방식이 변화를 겪었다는 것이어니와 

그리하여 가슴팍에 걸치기도 했겠으며, 또 따로 아예 두는 방식을 썼을 수도 있다. 

다만 우리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은 원칙이다. 

동경은 등에 울러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무령왕릉에서 단적으로 확인하며 

나아가 무엇보다 경산 양지리 목관묘에서 더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 심각성을 조사단인 성림문화재연구원도 몰랐고, 해당 관련 유물 일체를 이관받아 전시 중인 경산시립박물관도 그 심각성을 여직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등때기에 울러맨 양지리 목관묘 동경

 
그 양지리 보고서 봐라. 분명히 시신 등 아래서 동경이 출토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경산시립박물관 관련 영상도 그리 설정했다. 

다만 보고서도 그렇고 영상도 그렇고, 이 심각성, 곧 동경은 본래 등때기에 둘러맸다는 이 사실을 전연 모른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있다. 

이 점은 대서특필해야 한다. 

 
*** previous articles ***
 

동경은 등때기에 울러맸지 가슴팍에 걸치지 않았다

동경은 등때기에 울러맸지 가슴팍에 걸치지 않았다

동경, 곧 청동거울이 출토하는 양상을 보면 첫째 무덤 혹은 그에 버금하는 곳, 곧 부처님 산소인 탑 같은 데가 압도적이고 둘째 각종 문양이 있는 곳이 실은 거울 뒷면이라 거울 본연의 기능과는

historylibrary.net

 
 
동경은 등때기다 울러맸지 가슴팍에 걸치진 않았다!!!

동경은 등때기다 울러맸지 가슴팍에 걸치진 않았다!!!

오늘 외우 차순철 선생이 소개한 '영국 캠브리지대학에 소장된 몽골의 샤먼 옷'이다. 거울 여러 개를 걸쳤는데 걸친 모양을 유심히 봐 주기 바란다. 이것이 바로 동경을 몸에 착장하는 방식이다.

historylibrary.net

 
 
동경을 등때기에 울러매고 다닌 왕망

동경을 등때기에 울러매고 다닌 왕망

전한을 붕파하고 新 왕조를 개창한 왕망은 의심이 많았다. 그리하여 독심술을 개발하는데 그 도구가 거울이었다. 왕망은 항상 거울을 등때기에 매고 다녔다. 등 뒤에서 자기 목숨을 노리는 자들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