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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문체반정을 시도한 것은
본인이 도통을 이었다고 자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유교에서는 공자 이후
왕이 도통을 이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도통을 군주인 자신이 이었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 끝낸 양반이 영조,
대 놓고 내가 도통을 이었다고 외친 이가 정조였다.
본인이 도통을 이었고 사문의 수호자를 자임했으니
문체도 고문으로 되돌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도대체가 문체반정을 하겠다고 나선 군주를
근대적 싹수가 보이는 왕이라도 떠받드는 사람들을 필자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도통을 이었기 때문에 사대부들 너희는 입닫고 나를 따라와라.
내가 곧 정의요 황극皇極이니 너희는 싸울 필요도 없다.
나만 따라오면 된다.
이것이 탕평책이고 황극론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땅에서조차
공자 이후 왕이 설치면서 도통을 이었다는 왕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조가 신하를 데려다 놓고 가르친 이유는
내가 너보다 더 잘 알아서라고 생각했기도 했겠지만,
본인이 도통을 이었다고 자임한 탓도 있을 것이다.
정조야말로 유학사상 최초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놀던 도통을 자기가 이었다고 나온 양반이고
이 양반의 모든 행동은 그에 준해서 해석해야지
뭐 대단한 "근대적 속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조-.
일종의 과대망상이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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