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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Baekje Stone Sarira Shrine with Inscription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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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uyA8EbGWJ8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발굴되어 국립부여박물관이 전시 중인 이 유물엔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란 글자가 새겨져 백제 창왕昌王 곧 위덕왕 시대인 567년에 왕의 매형공주가 만들었음을 안다.

 

Stone Sarira Shrine with Inscription
Beakje period, Excavated in 1995 from Neungsangri Temple Site, Buyeo



This is a pottery for Buddha's reliquary. It is 74cm high, 50cm wide, and 45cm deep.

This artifact was excavated at the Neungsan-ri Temple Site underneath the wooden-tower area.

It was used for holding Buddha's Sarira, a reliquary.

During the excavation, this artifact was demolished, so there is no sarira inside of it.




The sarira reliquary has a half cylinder shaped roof and a flat base. Inside is tunnel shaped.

It is recognized to have a safety system and a door.

On each side of the pottery, there is 10-character passage explaining its origin.




The sister of King Wideok, the twenty-seventh king of the Baekje Dynasty, developed it.

This artifact became very important for researching Baekje Dynasty's cultural history.

Its precise description of the origin and potter helped explain other excavations from the site.




百济时代用于保管舍利的容器,在陵山里寺址的位于中央的木塔下面发现的。这个舍利龛作为研究百济历史的新的金石文资料,是可以了解百济和中国的文化交流情况的资料,供奉者和供奉舍利的年代确切,在百济寺址当中通过当时的遗物确认寺院创建年代的最早作品。


百済時代に舎利を保管していた容器で、陵山里寺址の中央部に位置した木塔の位置から発見された。この舎利龕は百済史の研究の新しい金石文資料として、百済と中国との文化交流の一面が把握できる資料である。舎利を奉安した年代と供養者がはっきりしており、百済の寺跡としては、寺の創建年代が当時の遺物によって初めて明かになった作品である。

문화재 지정명칭은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이다.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 가로·세로 50㎝이다. 감실 내부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발견된다.

감실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시대 서체인 예서(隸書)풍 글자가 10자씩 새겨졌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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