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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서간문이 폭로한 연암 박지원의 내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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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아들이 쓴 '열하일기' 필사본

 

 

2005.06.02 05:01:27
<연암서간문집을 통해 폭로된 인간 박지원>(1)
궁상맞은 늙은이에서 자상한 아버지ㆍ할아버지 
박제가ㆍ유득공에 대한 애정어린 비평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해 가을 내 화포 두루마기를 유득공에게 빌려 주었다. 이번 수군(水軍) 조련 (훈련) 때 마땅히 철릭 아래에 받쳐 입어야겠으니 즉시 찾아와 보내주는 것이 어떠하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득공에게 보내준 두루마기 돌려받아 달라 부탁하는 주인공이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1797). 당시 그는 면천군수였다. 

 

환갑이 된 노인네가, 명색이 그것도 군수나 되는 사람이 궁상맞게 제자격인 유득공(柳得恭.1749-1807)에게 빌려준 두루마리를 돌려받겠다고 나서고 있다. 더 웃기는 건 그것을 돌려받으려는 연암은 연암이고, 또 그것을 돌려주지 않은 유득공은 무슨 배짱인가?

 

그래서일까? 유득공에 대한 연암의 평가는 몹시도 박하다.

 

 

연암 아들이 쓴 '열하일기' 필사본

 

 

오례통고(五禮通考)라는 중국에서 편찬된 책이 있다. 역대 중국 의례를 집대성한 방대한 문헌인데, 이것을 유득공이 먼저 입수했었나 보다. 한데 워낙 분량이 방대해서인지 유득공을 이를 쪼개서 읽은 듯하다.

 

이 소식을 듣고 연암도 어떤 경로를 통해 오례통고를 보았다. 그 소감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 갑을 대략 훑어보았더니 참으로 좋은 책이더구나. 뇌아(賴兒. 유득공)가 이를 얻어 비록 손과 발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고는 했지만, 책을 묶어두고 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비록 한 차례 섭렵하였더라도 찬찬히 궁구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반드시 유생(柳生) 무리에게 이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 유는 더함을 구하는 사람이 아닌 데다 침잠하는 기상이 적어, 단지 책을 빌려 박식을 뽐내기만 좋아할 뿐이다."

 

박식함을 자랑하는 유득공에 대한 대단히 신랄한 평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박지원은 급할 때마다 박제가와 함께 유득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증오가 아니라 애정어린 비판이라고 보아야 할 대목이다.

 

한데 유득공을 비난하는 이 편지에는 "나는 언문(諺文)을 모르니까"라는 구절이 보인다. 연암이 '한글까막눈'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를 통해 새삼 그의 '한글 문맹'은 사실로 굳혀지게 됐다.

 

 

연암의 목민에 대한 생각을 담은 칠사고七事考

 

 

박제가에 대해서도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연암의 생각이 폭로된다.

 

"재선(在先. 박제가)이 집에 소유하고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詩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형편없고 무도하니, 어찌 능히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놓겠느냐? 모름지기 이를 빌려 오도록 해라."

 

이로 보아 박제가는 좋은 책은 혼자서만 보는 벽이 있었으며 그것을 좀체로 남들한데 빌려주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심지어 연암에게도 빌려주려 하지 않다니?

 

그렇다고 그런 행태를 비판하는 연암 "쫀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존재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고 있는 백선(伯善)이란 사람의 부자에  대해서는 "그 미봉책으로 그때 그때 모면하는 어리석은 몰골은 전에 비해 어떻더냐?"고 아들에게 묻고 있다.

 

 

열하일기 한글본

 

 

 

2005.06.02 05:02:27
<연암서간문집을 통해 폭로된 인간 박지원>(2)
궁상맞은 늙은이에서 자상한 아버지ㆍ할아버지 
박제가ㆍ유득공에 대한 애정어린 비평

 

그의 글쓰기 행태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일필휘지형이 아니었다. 다듬고 또 다듬는 스타일이었다. 한데 그것이 귀찮거나 힘에 부칠 때는?

 

대필이나 표절을 했다. 그것도 임금이 편찬을 명한 글에서 그랬다. 가장 자주 대필을 부탁한 사람은 역시나 유득공과 박제가였다. 한데 이런 대필 요청에 "뺀질뺀질한" 유득공은 번번이 부탁을 어겼으나 그래도 박제가는 우직한 면모를 보인다.

 

연암이 표절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요 그 자신의 증언이니 믿을 수밖에.

 

이방익이란 제주사람이 1796년 9월 21일, 제주에서 서울에 있는 부친을 뵈러 배를 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했다. 이후 팽호와 대만, 하문과 복건ㆍ절강ㆍ강남ㆍ산동 등지를 거쳐 북경에 이르고, 다시 요양을 거쳐 이듬해인 1797년 윤 6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이방익은 문자를 겨우 알 뿐 표류 과정에 대해서는 노정만 기록해 놓았을 뿐이었고, 기억조차도 몹시도 가물가물해 표류 증언이 앞뒤 차례가 뒤죽박죽이었다. 이런 판에 정조는 연암에게 그의 표해록을 작성해 올리라는 명을 내린다.

 

실로 난감해진 우리의 연암. 

 

 

연암 서간문

 

 

"이방익이 말한 것이 자세하지가 않고, 본 것도 찬찬히 살피지 못한 데다, 사물의 이름이 잘못된 것이 많고, 일의 형상도 정확치가 않네. 유람한 산천 누대와 지나쳐 온 고을의 도리(道里)도 반드시 사실이 잘못된 것이 많을 것이므로 한글로 된 기록을 다 따를 필요는 없을 걸세. 

 

다행히 '일통지'(문헌이름)와 그 밖의 전기에 실린 것에 의거하여 베껴 써서 채워 기술하여 완연히 눈으로 본 것 같이 하여 파란과 생색을 낸다면 비록 고인의 작품 속에서 한차례 옮겨 적어오더라도, 이것으로 저것을 징험하면 사실이 서로 맞아 떨어질 터이니 진부한 것을 신기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그 가운데 있다 하겠네."

 

도대체 이것이 우리가 아는 조선의 대문호 연암인가 눈을 비비게 한다.

 

그러나 이 이방익 표해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역시 연암을 당시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는 혜안을 번득인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춘추존양의 의리에 엄격한 지라, 걸핏하면 중국에 변이(변괴)만 있기를 바라며, 먼 모퉁이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져다 붙이기를 즐겨, 언제나 묘만(苗蠻)이 강남 길을 끊어 막은 것으로 의심을 하곤 하오. 

 

금번 이방익이 바다에 표류하여 민월(지금의 중국 남쪽) 땅을 두루 뚫고 지나와 만리에 막힘이 없었으니 그렇다면 사해가 편안하고 조용한 것을 징험하기에 충분하니 속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러 의심을 통쾌하게 깨뜨린 셈이오. 이는 그 공이 진실로 보통의 한 사람 사신보다 훨씬 낫다 하겠소."

 

오랑캐 만주족에 세운 나라라 해서 청(淸)을 멸시하기만 하면서, 반란이 일어나 그 왕조를 붕괴시켜 주기만을 기다리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연암집 필사본

 

 

2005.06.02 05:03:28
<연암서간문집을 통해 폭로된 인간 박지원>(끝)
궁상맞은 늙은이에서 자상한 아버지ㆍ할아버지 
박제가ㆍ유득공에 대한 애정어린 비평

 

연암 글의 특징 중 하나로 해학성이 자주 거론된다.

 

한데 그런 면모는 이번에 공개된 그의 서간집인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보면 더욱 번득인다. 지방관으로서 바쁜 일상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고는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솝소서'나 '저저자자' 등의 소리를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 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가석하게도 어느새 만 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바쁜 공무에 불현듯 생각난 좋은 문구가 그만 만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났다니?

 

넉살스런 연암의 모습은 다음 구절에서도 완연히 포착된다.

 

"밤비가 마치 부견(중국 북조 전진 왕조 건국자)이 강물에 던진 채찍처럼 처정처정 집을 뒤흔들며 밤새도록 잠을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벼룩이 수도 없이 튀어 오르니 거의 크게 소리치며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것만 같습니다. 모르긴 해도 고헌(高軒)께서는 능히 이같은 근심을 면할 수 있으신지요? 남에게 보낼 긴 편지 한 통을 보내오니 한번 웃고 보시기 바랍니다."

 

 

칠사고七事考

 

 

이 외에도 이번 서간집에는 그의 인간미, 특히 아버지 혹은 시아버지, 나아가 할아버지로서의 푸근한 가정적인 면모도 물씬 풍겨난다.

 

직접 담근 고추장을 한 단지 아들에게 보내면서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고 하는가 하면, 그럼에도 그 고추장에 대한 아무런 품평이 없자 "어째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라고 나무라기도 한다.

 

아들이 자신이 직접 베껴 보내준 '소학감주'라는 책을 분실하자 "네가 서책에 대해 성의 없기가 이와 같으므로 늘상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나는 문서를 살피는 여가에도 오히려 능히 한가한 일에까지 미쳐 때때로 책을 저술하고 혹 법첩을 임서하며 붓글씨 연습을 하는데, 너희들은 일 년 내내 무슨 일을 일삼고 있는 게냐?"고 나무라는가 하면 과거시험을 앞둔 아들에게는 답안의 필획을 좀 더 도탑고 듬직하게 쓰라는 주문도 남기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옛날에 그러했듯이 시험에 대해서는 "합격여부에 상관하지 말고, 다만 들고 나는 것을 잘해서 욕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위로하기도  한다. 

 

안의현감 시기에 얻은 손자 효수(孝壽)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편지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분만을 앞둔 며느리에 대한 걱정이 보이더니 출산 소식을 접하고서는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고 기뻐하고 있다. 

 

 

문장을 남녀 사랑에 빗댄 연암 친필

 

 

그러다가 며느리의 산후 조리를 걱정하는 이야기와 손자의 삼칠일에 관아의 아랫사람들에게 국과 밥을 먹인 일이 차례로 기록하고 있다. 

 

손주 사랑과 관련해 웃음이 절로 나는 대목은 다음이다.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그 사람 꼴을 갖춤이 자못 초초하지 않다고 하더니, 종간(宗侃)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더구나.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편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직접 보지 못하는 손자의 골상까지 편지에 적어달라고 아들을 득달하고 있다. 어쩌면 "궁상맞은 늙은이" 같기도 하지만, 그래서 연암은 더욱 인간답다.

 

도대체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인간 박지원. 후세에 안 좋은 평가를 남길 만한 글은 모조리 빼어버리는 문집 전통에 따라 그의 문집 연암집에도 성인군자로서의 연암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한데 연암집으로 가공되기 전 인간 박지원. 그가 이번에 공개된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통해 우리 앞에 섰다. (끝)

 

 

당진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

 

 

 

2005.06.02 05:00:25
연암 박지원의 서간문집 발굴 공개
서울대박물관 소장, '연암집'에도 누락
'발가벚은' 인간 연암의 면모 풍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대문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미공개 서간문집이 사거 200주년을 맞아 공개됐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朴熙秉) 교수는 서울대박물관에 소장 중인 연암선생서간첩(燕巖先生書簡帖)을 역주본 형태의 단행본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사계절)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이와는 별도로 이 서간집을 거의 같은 시기에 입수한 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와 고서전문가 박철상 씨도 이에 대한 검토결과와 문헌해제 외에 원문 전부에 대한 역주를 완성했다. 그 성과는 이달에 발간될 학술잡지 '대동한문학'에 발표된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에도 누락된 이 서간집은 연암의 고손인 박기양朴綺陽(1876-1941)이 소장했으나 박영철(朴榮喆.1879-1939)이 이를 넘겨받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 이 연암선생서간첩에 수록된 서간(편지)들은 작성 시점이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60세가 되던 1796년(정조 20) 정월 27일부터 면천군수로 있던 이듬해 8월23일까지 걸친 것들로 모두 32통이 수록돼 있다. 하지만 이 중 2통은 이 서간집을 소장했던 박기양과 연암의 손자 박규수의 것으로 밝혀졌다. 


놀라운 점은 연암의 개인 일상사와 관련되는 편지가 대부분인 데다 박제가와 이덕무를 비롯해 당시 연암이 교류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매우 솔직한 평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박희병 교수는 "이 편지들을 통해 연암의 꾸미지 않는 맨얼굴을 대면할 수 있다"면서 "이런 특성 때문에 아마도 이들 서간은 연암집에 수록되지 못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편지에 나타난 연암의 박제가와 유득공에 대한 평가는 한편으로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으면서도 그들의 인간성을 비난하는 대목이 띄고 있다. 

 

세 번째로 수록된 '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연암은 재선(在先), 즉 박제가가 중국에서 나온 시필(詩筆)을 새로 입수했음에도 그것을 지보(至寶)로 여겨 자기에도 빌려주지 않으려 한다고 하면서 이런 박제가를 "망상무도(罔狀無道)하다",  즉 "꼴 같지도 않게 무례하다"고 비난하고 있다.

 

유득공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전에 유득공에게 화포  두루마기를 빌려주었으니 이를 냉큼 찾아오라는 내용이 보이는가 하면,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침잠하는 기상이 적어 단지 책을 빌려 박식을 뽐내기만을 좋아할 뿐이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들 서간문에는 연암이 글을 지은 과정에 대한 귀중한 증언들을 담고 있다. 왕명에 의해 편찬해야 하는 글에 대해서도 박제가나 유득공에게 초고를 부탁하는가 하면, 아예 대필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적당한 중국고전에서 좋은 문장을 따다가 자기 문장으로 삼는 소위 표절 행위를 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그런가 하면 5번째 수록된 역시 큰아들에게 부친 편지에서는 손자를 낳은 며느리 산후조리를 위해 "산후 복통에는 모름지기 생각나무를 달여 먹여야 하니, 두 번 복용하면 낫는다. 이는 네가 태어날 때 쓴 방법"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고추장을 손수 담궈 아들들에게 보내주었는데도 그것이 맛있는지 맛없는지 아무런 품평이 없는 아들을 득달하는 장면도 있고, 과거시험 볼 때 글씨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조언하는 모습도 등장하고 있다.

 

이 편지들은 연암 친필이라는 점에서 그의 서체를 연구하는 획기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정민 교수는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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