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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부석사 무량수전의 진실을 찾아서

by taeshik.kim 2020.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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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졌던 '부석사 사적'은 현재 남아 있는지조차 알수 없다. 아마 없어져서 더 이상 세간에 출현하지 않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하지만.....

암튼, 안보이든 사라졌든 그 사적을 제외하고 1945년 해방 이후 1970년대 까지 부석사 관련 사적의 흔적으로 세 가지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실물은 고사하고 복사본도 못봤다.

암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어지간히 검색 조사한 결과

1.1955년 부석사 전 주지였던 권계한權啓漢의 '부석사연혁사浮石寺沿革史'.(1955년)

2.부석면에 살았던 김진영金進英의 '부석사사적浮石寺事蹟'(1976년)

3.황수영 박사의 '부석사사적초'(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사적의 초안을 작성하셨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불교연구원의 '부석사', 대원사의 '부석사' 등이 부석사를 종합적으로 다룬 자료이다.

무량수전의 11세기 중건설의 근원을 찾아가보면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관야정關野貞(세키노 다다시)이나 등도해치랑藤島亥治郞(후지시마 가이지로)이 무량수전이 조사당보다 100년에서 150년 이전의 건물이라고 추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설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인용되어 왔으며, 權啓漢의 '浮石寺沿革史'에도 이를 바탕으로 1041년 원융국사의 중창을 제기하였고 이후 영주교육구청의 '고적등록'에도 이 설을 그대로 인용하였다고 한다.

특히 건축양식의 시기 문제를 들면서 조사당이 1201년 중수(?)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무량수전도 그 보다 앞서 중수, 중창하였을 것으로 보고, 關野貞 등의 주장에 따라 무량수전 중창년대를 끼워맞추기 한것으로 보인다.

1041년은 원융국사가 부석사에 왔던 때로 이후 12년간 이 절에 머물다 1053년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그러나 어느순간에서 부터인가 원융국사의 무량수전 중창은 1016년이라는 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 그 근거로 막연히 '원융국사비문에 따르면...' 이라는 그럴듯한 소설이 정설로 인정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1611년 부석사 무량수전 개연기에서 원응을 원융으로 잘못 기록하면서 첫단추는 잘못 끼워졌지만 이 부분에 대한 진상 규명은 착오라는 것으로 결론 지어진지 오래다.

결국 무량수전 중수 연대에 대한 오류는 일제강점기 關野貞 등이 주장한 조사당보다 100~150년 앞선 시기의 건물이라는 설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근거로 원융국사를 삽입하였고, 거기에 국사의 비문까지 위조하여 11세기 무량수전 중수설을 만들어 낸것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뭐할런지 모르겠지만 일제 잔재를 그대로 답습하고 그것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킨게 바로 '무량수전 11세기 원융국사 중수설'의 전말이다.

불쌍한 무량수전......
부석사의 불행은 이 무량수전이 존재했음으로해서 시작되었다.

아니 1300년 역사가 무량수전으로 인해 산산조각났다.
모두가 무량수전에 팔려있는 그 때 부석사의 전체 역사는 땅에 묻히고, 파헤쳐져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 실낱같은 진실을 안고 있었던 최후의 보루 '무량수전'이 부석사의 과거를 송두리째 말아 먹은 것이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지는 석양 바라보며 뭐 대단한 일갈을 하고 최고라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대성통곡을 한다.

눈앞에 있는 의상스님의 비석도 건지지 못하는 이 비참한 지경에서 무량수전은 무어라 말할까.

***

이상은 부석사성보박물관을 거쳐 현재 송광사성보박물관에서 일하는 김태형 선생 2017. 11. 15 글과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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