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연구성과 검토라는 미명 아래 등장한 논문 양태. 국내 논문 10편 중 9편이 이 모양이다.
****
내가 매양 우리네 이른바 학술계 글쓰기, 특히 논문쓰기 행태를 비판하거니와 그러면서 그 대표적인 병증의 하나로 패턴화한 글 전개 방식을 거론한다.
이 패턴화로 매양 논문 첫머리에는 '선행연구성과 검토'라는 항목을 설정하고는 잡다스레 그 글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관련한 기존 연구들을 소위 비판적으로 다루는 항을 두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해당 글 첫 페이지에는 늘 본문 몇 줄에 그 선행연구라는 서지사항이 오래된 목선 바닥 조개껍데기 덕지덕지 달라붙듯 각주로 열리게 마련이다.
이걸 왜 없애야 하는가?
재미없기 때문이다. 이 선행연구성과 검토라는 항목만 쳐다보면 막 들어서는 애도 떨어질 판이요, 전날 숙취에 겨우 가라앉은 오바이트가 다시금 솟아오를 판이다.
선행연구성과 검토를 하지 말란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글 이곳저곳에 소리소문없이 말살하듯이, 형가 같은 자객이 비호처럼 비수를 내밀어 암살하듯이 형해화해 한다.
숨이 턱하니 막히는 난공불락과도 같은 선행연구성과라는 산은 포크레인으로 쏵 밀어버려야 한다.
*****
우리네 논문이라는 걸 보면, 그에서 벗어난 것도 없지는 않으나, 대체로 논문 첫 대목에 잔뜩 각주 붙이는 무언의 관습이 바로 이 선행연구성과 검토라는 강제에서 비롯한다.
국문학도 조동일 선생이 언젠가 말하기를 자신은 각주 하나도 없는 글을 쓰고 싶다 했으니, 자기 얘기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나는 받아들인다. 각주 없는 글을 쓰야 한다.
****
나도 논문 몇 편 긁적거리다 보니, 때로는 학회에 투고한 논문을 심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반대로 내가 투고한 논문이 내가 알 수 없는(알 수 있는 때도 있다) 사람들에게서 반드시 심사를 받는다.
이 두 경우 모두 우리 학계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불문률이 있다. 그건 해당 논문과 관련한 논저가 있는 사람이 거의 예외없이 심사를 맡는다는 사실이다.
내가 몇 차례 심사한 논문 또한 내가 긁적거린 논문 주제와 직간접으로 연결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논문 심사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건 이 분야 직업적 학문 종사자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특정 주제와 관련한 논저를 쓴 사람은 그 논리에 함몰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런 논리가 논문 심사에도 반영되어 심지어 자기 논지와 다른 주장을 했다 해서 게재 불가판정을 내리기도 한다. 이에 더해 왜 내 글은 참고문헌 혹은 각주에서 빠져 있냐고 지랄을 하기도 한다. 나는 학문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논문 심사 시스템이 바뀌거나 보완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걸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모 학회지에 투고할 내 논문 심사서 세 명분을 받고 보니, 적잖은 도움이 되는 지적도 물론 있지만, 얼토당토 않은 주장도 적지 않다. 개중 하나로 선행연구성과 검토 미비라는 말이 있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선행연구성과 잔뜩 나열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바탕 위에서 논지를 전개하라는 뜻이니, 내가 그 의미를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쓰레기들을 내가 치워야 할 의무는 없다. 내 얘기하기도 바쁜데 미쳤다고 한가롭게 그 쓰레기를 주워담아야 하겠는가?
반대로 나는 최근에 모학회가 심사 의뢰한 논문은 게재불가 판정을 내려 돌려보냈다. 이유는 표절이었다. 한데 그 표절이라고 지적한 대상이 바로 내 논문이었다.
나 스스로 나를 옭아매지 않았냐 해서 반려한 그날 이후 내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기만 하다.
****
작금 학술지 등재 심사에서 매양 빠지지 않는 대목이 선행연구성과 소화 여부다. 이게 표절과도 연관하니 어찌 미묘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하지만 이게 현장으로 가면 쓸데없는 각주가 덕지덕지 붙은 논문으로 변질한다.
인용 가치가 없는 것들까지 모조리 긁어다가 덕지덕지 붙이는 바람에 썩은 시체에 구더기 끓듯 각주가 붙는다. 인용은 的實해야 한다. 도저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성과만 인용해서 그것을 비판하건 인용하건 하면 된다.
나는 거의 인용 안 한다. 내가 선행 연구성과를 인용안한다 해서 내가 반드시 표절인 것은 아니다. 내 얘기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왜 씨잘데기 없는 남의 글까지 쳐다본단 말인가?
****
이상은 그간 내가 이곳저곳에 싸지른 비슷한 문제의식 단문 서너편을 편집한 것이다.
'ESSAYS & MISCELLAN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행연구성과를 말살하는 법 (0) | 2018.12.30 |
---|---|
하나의 김유신(the Kim Yushin)과 김유신들(Kim Yushins) (0) | 2018.12.29 |
정정보도와 반론보도 (0) | 2018.12.23 |
무한반복 OCN, 뇐네 용돈 찔러주기용 구색 '기조강연' (0) | 2018.12.21 |
불알 두 쪽과 백미터 달리기 (0) | 2018.1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