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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하나의 김유신(the Kim Yushin)과 김유신들(Kim Yushins)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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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김유신(the Kim Yushin)과 김유신들(Kim Yushins)
- 김호동, ‘金庾信의 追崇에 관한 연구’에 관한 토론을 겸하여- 


신라사학회 100회 발표회(2011.1.29(土), 서강대 김대건관 505호) 토론문

김태식

경주 황성동공원 김유신 동상


신라 중대의 野合 스캔들의 산물이면서, 각종 戰場을 누비며 신라가 염원하는 一統三韓을 이룩한 데 일대 元勳인 金庾信이 자기복제를 하지 않은 이상, 여러 명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足跡이 다른 어떤 역사상의 인물들과 남달라서인지, 이런 역사상의 金庾信, 즉, 하나의 金庾信(the Kim Yushin)을 원형(arch-type)으로 수많은 變種의 金庾信이 양산한다. 이 變種 金庾信을 총괄하여 ‘김유신들’(Kim Yushins)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발표자가 金庾信을 논할 때면 항용 거론되는 구한말-식민지시대 지식인이요 열렬한 독립투사였으며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丹齋 申采浩의 김유신에 대한 평가를 들었거니와, 하나의 金庾信像으로만 고정된 것만 같은 ‘丹齋의 김유신’도 실은 복잡한 구석이 있어,

1910년 이전에 그가 쓴 몇몇 글을 보면, 전통시대 從來의 忠을 구현한 典形으로서의 김유신의 이미지를 충실히 구현한 단재를 본다.

이로써 본다면 丹齋라는 같은 사람에게도 그의 일생을 통괄하면 적어도 ‘두 개의 金庾信들’(at least two Kim Yushins)을 우리는 검출한다. 

評者로 말할 것 같으면 이런 丹齋에 대해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 이른바 피가 끓던 시절에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評者를 격발케 하던 그런 모습이었다가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자라면서는 그것의 始原을 연 내셔널리시트의 원조격으로 다가왔으며, 그것이 지난 요즘은 그의 글을 읽으면 젊은 날의 擊發, 그에서 더 지난 때의 反感 대신, 優秀와 同情과 憐憫의 인물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評者에게도 丹齋는 단일한 像이 아니요, 적어도 ‘3개의 신채호들’이 있듯이, 金庾信 또한 시대와 공간에 따라서는 물론이요, 시대, 혹은 공간을 같이한다 해도, 계층에 따라,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의 김유신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발표 ‘金庾信의 追崇에 관한 연구’는 the Kim Yushin이 아니라 Kim Yushins에 대한 탐구다. 즉, 역사상 어떠한 김유신들이 존재했는지를 추적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발표는 그 연구방법과 시각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높이 평가되어도 좋다. 실은 한국 역사학, 특히 개중에서도 한국사에 국한해 그 직업적 학문종사자들의 연구성향을 볼진댄, 이와 같은 후자에 대한 연구가 태부족이라는 사실이 評者로서는 늘 불만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金庾信에 대한 이런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민속학 분야의 성과는 광범위하면서 집요하고, 분석적이다.

하지만 그 학문의 특성이 ‘지금, 현재’(now and here)와 field work를 중시하는 까닭에 이른바 통시적, 공시적 성찰까지 아울러 기대하기는 곤란하다. 이런 부족한 부문은 어쩌면 역사학의 직업적 학문종사자에게는 특권일 수 있다. 

아마도 발표자가 着目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역사적으로 어떠한 ‘김유신들’이 존재해 왔는지를 追崇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그것을 통시적으로 고찰하고자 김유신 사후 이래 조선시대까지를 그 전개양상을 살폈으며, 한편에서는 공시적인 관점에서는 주로 조선시대를 대상으로 삼아 여러 지역에 나타나는 그 추숭 양태를 정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막상 構想 단계를 떠나 실천으로 옮겨질 때 적지 않은 충돌이 수반한다. 이번 발표 또한 김유신 사망(673)을 기준으로 할 때, 천수백년의 여러 김유신들을 탐구하고자 한 실로 담대한 계획과는 달리 어그러진 듯한 모습이 보인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건대 

첫째, 무엇보다 전체 제목과 세부 목차를 손질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평자가 보기에 ‘追崇의 측면에서 본 역사적 김유신’ 정도가 타당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플로어의 다른 평자들도 다른 주문이 있을 것이다.

나아가 세부 목차는 전형적인 편년체 서술을 따라 시대별 김유신들의 양태를 정리하고자 했으나, 그 첫 번째가 ‘통일신라시대의 김유신 顯彰’이라 했으면 그 다음은 단연히 ‘고려시대의 김유신’이 따르고, 다시 그 다음은 ‘조선시대의 김유신’이 나오고, 이에서 더 욕심을 낸다면 ‘근현대의 김유신’으로 대미를 장식해야 하겠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느닷없이 ‘김유신에 대한 지역별 추숭의 사례’가 등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에 전체 표제와 세부 목차는 좀 더 세밀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 그 세부로 들어가 사료 검출이나 해석, 그리고 선행 연구성과 검토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은 부분이 보인다. 예컨대 발표자는 고려시대 김유신의 추숭과 현창 사례로 이른바 정사류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정도만을 언급했지만, 그리 많지 않은 이 시대 문집류 등지에도 김유신의 추숭 양태를 직,간접으로 증언하거나 자료들이 있으니,

널리 알려진 김유신과 천관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어머니 萬明에 대한 남다른 고려시대 지식인사회의 관심(이것이 결국 발표자가 말하는 追崇의 일 단면이 될 것이다)을 읽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주로 城隍堂 제사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조선시대 김유신의 추숭 양태 또한 적어도 발표자의 글만으로는 그것이 동시대에 존재한 것인지, 아니면 시차가 있는 것인지를 알기가 곤란하며, 나아가 혹여 지역별 특징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언급이 보이지 않은 듯하며, 단순히 김유신의 사당과 관련한 사료만을 ‘나열’한 데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준다. 

셋째,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발표자에 의하면, 김유신은 한국사에서 천 수백년 동안이나 면면이 呼名되었거니와, 그렇다면 왜 김유신을 호명했던가에 대한 판단이 보이지 않는다.

절대적 忠을 구현한 忠臣의 전형이었는가? 아니면 또 다른 김유신(another Kim Yushin)이 있었던가? 

원래 훈수는 말이 많은 법이며 제깐에는 판이 다 보이는 법이다.

그런 말 많고 모든 판을 한 눈에 본다고 착각한 평자의 말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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