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독자적" 역법의 신화

경진대통력

 

전통시대에 역법이란 천자가 만들어 책력을 뿌리는 법이라 주변 제후국은 그 역법을 받아 쓰기만 하면 되었다.

거의 신화가 되어버린 이야기 중에는 동아시아에서 역법이란 황제가 만들어 쓰는 것이라 주변 제후국에서는 이를 만들어 쓰지 못했다는 것이 있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고려와 조선이 고유의 책력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는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역법"을 만들려고 한 것이라는 믿음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어차피 중국에서 받아오는 책력이 잘 맞기만 한다면야 그걸 그냥 쓴들 뭐가 문제일 것이며 그 달력이 싫어서 "독자적 역법"을 만든다고 한들 도대체 잘 맞는 달력을 놔두고 독자적 역법을 따로 또 어떻게 만든다는 말인가?

역사적 실제 상황은 한국 고유의 독자적 역법을 만들고자 했다는 한가한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에서 받아온 책력은 요즘으로 이야기 하자면 수학 문제집에 문제와 해답만 있고 풀이과정이 몽땅 생략된 것이나 다름 없어 조금만 응용해서 써보려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수학 문제를 문제와 해답만 주고는 응용이 안 되는 문제를 자꾸 출제하니 미칠 노릇 아닌가?

따라서 한국의 "독자적 역법"을 만들고자 했다는 시도는 사실 알고 보면, 중국에서 전해진 문제와 해답뿐인 수학책을 놓고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해답이 나왔는지 그 원리를 터득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떻게 이런 답이 나왔는지 알아야 응용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칠정산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실 칠정산의 기초가 되는 수시력은 이미 조선 세종 이전에 들어와서 쓰이고 있었다.

칠정산은 그 달력을 조선이 처음 만든 것도 아니고, 또 칠정산이 완성되면서 비로소 한국에서 이 달력을 쓰게 된 것도 아니다.

이미 수시력은 쓰고 있었지만 조선의 식자들은 그 원리를 완전히 이해를 못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응용계산에 도통 자신이 없더라는 이야기이다.

원리를 모르니 공식을 달달 외워 수학을 푸는 학생이 문제를 조금만 바꿔도 막히는 것처럼 잘 맞지 않을때 고쳐 쓸 수가 없었다는 소리.

그래서 필사적으로 그 풀이 과정을 머리를 쥐어짜내 알아낸 것이 칠정산이다. 요즘 말로는 이런 것을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문제와 답 달랑 주고 풀이 과정을 만들어 내야 하니 그 어려움은 아마 매우 컸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수시력 이후, 조선후기에 시헌력이 들어오면서 또 반복되었다.

모처럼 칠정산을 잘 쓰고 있는데 이번에는 중국에서 시헌력이 들어왔고 그것이 그렇게 좋더라는 소문이 돌더라는 이야기.

그런데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리를 완전히 알고 있는 수시력 (명대에 이름만 바꾸어 대통력이라 했다)에 비해 시헌력은 좋다고는 하지만 그 원리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

따라서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수시력을 써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오랫동안 논의가 지속되었으며 결국 시헌력을 도입하는데 자그마치 40 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한다.

그 동안 우리도 물론 놀았던 것은 아니고 이것이 맞기는 맞는 달력인지 관측치와 비교하고, 또 그 원리를 찾아 골머리를 싸맨다.

마침내 시헌력을 조선이 완전히 이해하게 된 것이 18세기 초반.

우리 조상들이 대충 아무렇게나 살았던 것 같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이처럼 끝까지 해결 방법을 찾아낸 것이 많다.

중국에서 가져다 준 것이라고 해서 이해도 안 가는 것을 막 가져다 쓰지는 않았다는 이야기.

흔히 조선이 망한 이유를 대충 살며 일 안 하고 놀아제낀 조상탓을 하는 경우를 보는데 실제로 놀아서 그렇다면 다행이다.

앞으로 놀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한국사, 우리 조상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문제는 전혀 놀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문제이다.

죽도록 일했는데도 망했다면 심각한것 아닌가?

그래서 조선시대의 망국의 이유를 찾는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라 우리나 우리 자손들 미래와도 밀접히 관련히 되어 있다는 것이다.

놀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면 그 망국의 이유는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땅에서 언제든지 반복될수 있으므로.

시헌력. 오늘날 "음력"이라고 하면 바로 시헌력을 의미한다. 청나라 때 우리쪽으로 수입된 달력으로 이것도 정확히 그 원리를 이해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