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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송아지 팔아 청산하는 몸값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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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 나한테 팔라"


전한(前汉) 왕조 제8대 황체 유불릉(刘弗陵)은 죽은 뒤에 종묘에 신주가 안치되면서 받은 묘호(廟號)가 효소황제(孝昭皇帝)라, 흔히 약칭해서 소제(昭帝)라 칭한다. 무제(武帝) 유철(刘彻)이 아버지고, 어머니는 조첩여(赵婕妤)이니, 생전에는 구익부인(钩弋夫人)이라 일컬었다. 기원전 94년에 태어나 기원전 87년, 불과 8살에 황제에 옹립되어 재위 13년째인 기원전 74년 6월 5일, 21살에 미앙궁(未央宫)에서 요절하고 만다. 어린 그를 곽광(霍光)과 김일제(金日磾)와 상홍양(桑弘羊)이 보좌했다. 


이런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평릉(平陵)이라 하니, 미앙궁에서 전전(前殿)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22킬로미터, 아버지 유철이 묻힌 무릉(茂陵)에서 서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여타 이 시대 황제릉이 그런 것처럼 평릉 역시 봉분이 사각 쐐기형인 복두형(覆斗形)이라, 밑변 기준 둘레 2천700미터, 높이 29.2미터이며 이곳 해발고도는 515.42미터다. 좀 더 자세히 보면 공중에서 내려다본 평면 형태는 장방형(长方形)이고, 밑변 기준 동서길이 2,097미터에 남북 폭 1,396미터다. 능원 주변으로는 담당을 쌓았으니, 조사 결과 모두 5곳에 이르는 궐문闕門이 있었다. 


서쪽에 그의 왕비인 상관황후(上官皇后) 능이 있으며, 주변으로 그에게 봉사한 신하 등을 묻은 딸린무덤인 배장묘(陪葬墓) 57좌가 있었지만, 현재는 23기만 남았다. 배장묘에 묻힌 주요 인물을 보면 두영(窦婴)과 하후승(夏侯胜)과 주운(朱雲)과 장우(张禹)와 풍현(韦贤) 등이 있다. 


당시 황제 묘역에는 소나무 잣자무 측백나무를 심었다. 요즘도 현대 한국사회 묘역에 측백나무를 심는 전통이 있으니, 이는 이런 전통과 결코 무관치 않다. 나아가 당시 황제릉 주변으로는 권문세가를 이주케 해서 신도시를 만드니 이를 능 주변에 조성한 도시라 해서 능시(陵市)라 한다. 


한대(漢代) 악부(樂府) 중에 이 평릉을 소재로 읊은 시가 있으니, 아래 소개하는 노래는 여타 악부민가가 그렇듯이 원래 없었던 듯한데 나중에 이를 채록하면서 앞 구절을 따서 평릉행(平陵行)이라 한다. 이 경우 行이란 이 경우 그냥 노래 유행가 정도를 뜻한다고 보아 대과가 없다. 


서안의 어느 서한 황제릉


 

평릉平陵 동쪽엔 소나무 잣나무 오동나무 

어떤 사람이 의공義公 잡아갔네 

의공 잡아다 마루 아래 세워두고는 

돈 백만냥 말 두 필과 바꾸자 하네

말 두 필은 어디서 얻는단 말인가? 

날 따르는 관리를 돌아보니 속만 쓰리네 

속 쓰리니 피가 빠져가가는 듯 

집으로 돌아가 우리집 누런 송아지 팔자하네


平陵東松柏桐

不知何人劫義公

劫義公在高堂下

交錢百萬兩走馬

兩走馬亦誠難 

顧見追吏心中惻

心中惻血出漉

歸告我家賣黃犢


의공은 핍박받는 사람의 대명사로 내세운 가공 인물이다. 평범한 백성, 혹은 농민임이 분명한 그를 어느날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관리가 나타나 죄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관아로 연행해 간다. 이 관리가 하는 말이 돈 백만 냥을 주고 내 말 두 필을 사 가져가라 한다. 


하지만 가난한 의공한테 그런 거금이 있을 리 만무하지 않는가? 이 관리 역시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가 팔아넘기고자 하는 말 두 필 역시 어떤 백성한테서 강탈했음에 틀림없다. 그리 강탈한 말을 애꿎은 또 다른 백성한테 고가로 팔아넘기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진짜 속내는 아니었다. 


네가 이 말을 사가져가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 죄로 옭아 감옥에 넣겠다는 협박이었으니, 그 의도를 알아차린 의공은 할 수 없이 그 관리를 모시고는 자기 집으로 데려간다. 무엇인가로 대접해서 위기를 모면하려 한 것이다. 한데 의공 집 마굿간에는 마침 누른 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혹리(酷吏)는 그 송아지를 자기한테 팔라 한다. 공짜로 가져가겠다는 말이다. 혹 그것이 아니라면, 저 송아지를 팔아 나한테 뇌물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래저래 뜯기고 알거지가 된 백성들은 권문세가에 의탁하는 노비가 되거나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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