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도 그의 타계소식을 접하고는 내가 하나를 초한 적 있거니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건은 그런 식으로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어, 하나를 별도로 쓰라고 담당기자한테 주문을 했으니, 그것이 저것이다. 싸지른 글과 정식 사초에 남기는 일은 분명 다른 까닭이다.
이번 순간포착에서는 그날 저 봉변의 현장에서 있었던 사건 전개과정을 정리하는데 주력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당시 관련 기사들을 재배열했다. 시간대별로 깐쫑하게 정리를 잘 했다고 본다.
다만 아쉬운 점이 이 사건이 미친 여파를 짚을 여유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어쩌면 당시 권력으로서는 기다린 사건이었다. 누군가는 그 제단에 온몸을 던져 희생을 해야 했는데,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데서 정원식이 끌려가는 행운이 주어졌다.
저걸 누가 기획했다 하겠는가? 아무튼 정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생겼으니, 이 일을 기화로 학생운동, 나아가 노동운동을 짓누르는 호기로 활용한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그 시대가 정권에 아무리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했다 해도, 저런 일은 그런 시각을 지닌 사람들을 궁지로 몰 수밖에 없다. 대대적인 탄압의 빌미를 준 것이다. 실제로 그리 되었다고 기억한다.
저 사건이 터진 1991년 6월 3일은 나로서는 자세한 기억엔 없지만 날짜로 보아 학기말 시험기간이었다. 군대에서 징집해제되어 복학하고선 4학년 1학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었으니, 그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연애질 밖에 없었다.
그 시절이야, 요즘과는 상황이 달라, 갈 수 있는 기업이 늘린 시절이라, 썩 내 의지를 100% 충족하진 못한다 해도 취직 걱정은 없었던 시절이고, 덧붙여 저런 낙으로 하루가 짧은 시절을 보내던 시절이니, 저린 일이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뭐가 들어기나 하겠는가?
이미 시대는 바뀌었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니, 졸업 앞둔 복학생한테 이미 이른바 학생운동은 안중에도 없는 시대였으니, 나한테는 연대가 훨씬 더 중요했다. 이 연대가 이내 비극적인 결말을 내고 말았지만, 아무튼 저 시절엔 저러했던 까닭으로 저 사건이 생생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때는 기자가 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를 위한 따로한 준비를 할 필요도 없었던 시절이라, 그렇게 시간은 탱자탱자 룰루랄라 흘러갔던 시절이니, 신촌과는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에 내가 제대로한 눈길을 줄 여가가 없었다는 점을 말해둔다.
아..지금 생각하니 저 양반 저 사건이 더욱 불행한 까닭은 큰 키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일반 평균보다 머리 하나가 더 올라온 모습인데, 그래서 비극성이 배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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