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은 역사학자들이 연구해낸 개념으로 벌써 70년이 넘었다. 조선 후기에 이전과는 뭔가 다른 사조가 있다는 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져 있었다.
언론인이며 역사학자였던 고 천관우(千寬宇, 1925~1991) 선생이 서울대 국사학과 학부 졸업논문으로 ‘磻溪 柳馨遠 硏究’를 제출하였다. 당시 지도교수는 이병도 선생이었는데,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고 칭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천관우 선생 동창이 이기백 선생인데, 덕분에 닭이...)
그는 반계 유형원의 개혁론을 실학 발생의 시초라고 보았다. 이 방대하고 충격적인 논문은 《역사학보(歷史學報)》 2집과 3집에 나누어 실리게 되었으니 바로 〈磻溪 柳馨遠 硏究 (上)·(下) - 實學 發生에서 본 李朝社會의 一斷面〉(1952·1953)이다.
여기에서부터 실학이라는 역사학 개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학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에 따라 다 달라서 율곡 이이를 실학자라고 주장한 이도 있고, 정도전과 양성지를 실학자라고 주장한 이도 있었다.
실학은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라는 말에서 취한 것인데, 천관우 선생께 직접 들은 바로는 위당 정인보 선생께서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말씀하시면서 그 새로운 사조를 실학으로 가칭(假稱)하셨는데 이를 따랐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사구시는 성리학의 대명제이기도 하다.
이른바 실학자의 저작물들을 보면서 ‘이건 어디에서 인용했을까?’ ‘이런 방식은 어떻게 창안했을까?’ 고민한 지 30년이 넘었다.
그런데 한가지 결론에 이른 것은 철저하게 선진국 베끼기를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명나라, 청나라의 기준에 따라, 그들의 연구에 따라 조선에 실현해 보면 어떨까 하는 고민이었다.
어제도 이규경의 《오주서종신기화법(五注書種神機火法)》을 보면서 명나라 시영도(施永圖)의 《무비수화공(武備水火攻)》이라는 책을 제목만 바꾸어 쓴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른 이의 저작을 필사한 것이라고 가치가 없지는 않다. 그것이 널리 유통되어 조선을 복되게 했다면 가치가 클 것이다.
이제는 실학자를 무슨 메시아나 되는 것처럼 추앙만 하지 말고 그들 저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냉정한 반성을 해야 할 시점이다.
사실 베끼기와 표절의 최고봉은 다산의 《여유당전서》가 아닌가?
참고로 김정희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은 다음과 같다. 몇 부분 번역을 손봐야 할 부분이 있으나 번역원 번역을 그대로 옮긴다.
《한서(漢書)》 하간헌왕전(河間獻王傳)에 이르기를
“사실에 토대를 두어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實事求是]”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토대를 두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있어 배치(背馳)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한유(漢儒)들은 경전(經傳)의 훈고(訓詁)에 대해서 모두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어 정실(精實)함을 극도로 갖추었고, 성도인의(性道仁義)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때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깊이 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많이 추명(推明)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주석(注釋)이란 것이 있으니 이것은 진정 사실에 토대를 두어 그 진리를 찾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진(晉) 나라 때 사람들이 노자(老子)ㆍ장자(莊子)의 허무(虛無)한 학설을 강론하여 학문을 게을리하는 허술한 사람들을 편리하게 함으로부터 학술(學術)이 일변(一變)하였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짐으로써 선기(禪機)의 깨닫는 바가 심지어 지리해서 추구하여 따질 수도 없는 지경이 됨에 이르러서 학술이 또 일변하였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과 모두가 상반(相反)되었기 때문이다.
그후 양송(兩宋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을 합칭한 말)의 유자(儒者)들은 도학(道學)을 천명하여 성리(性理) 등의 일에 대해서 정밀하게 말해 놓았으니, 이는 실로 고인(古人)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육왕(陸王) 등의 학파(學派)가 또 실없는 공허(空虛)를 밟고서 유(儒)를 이끌어 석(釋)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석을 이끌어 유로 들어간 것보다 더 심한 것이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학문하는 도는 이미 요순ㆍ우탕ㆍ문무ㆍ주공(堯舜禹湯文武周孔)을 귀의처(歸依處)로 삼았으니, 의당 사실에 토대를 두어 옳은 진리를 찾아야지, 헛된 말을 제기하여 그른 데에 숨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학자들은 훈고를 정밀히 탐구한 한유(漢儒)들을 높이 여기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일이다. 다만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마치 갑제 대택(甲第大宅)과 같으니,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는데 그 당실은 문경(門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훈고는 바로 문경이 된다. 그러나 일생을 문경 사이에서만 분주하면서 당(堂)에 올라 실(室)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끝내 하인(下人)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당실을 들어가는 데에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히 한 나라 때 사람들이 당실에 대하여 그리 논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의 문경이 그릇되지 않았고 당실도 본디 그릇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晉)ㆍ송(宋) 이후로는 학자들이 고원(高遠)한 일만을 힘쓰면서 공자(孔子)를 높이어 ‘성현의 도’가 이렇게 천근(淺近)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이에 올바른 문경을 싫어하여 이를 버리고 특별히 초묘 고원(超妙高遠)한 곳에서 그것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이에 허공을 딛고 올라가 용마루[堂脊] 위를 왕래하면서 창문의 빛과 다락의 그림자를 가지고 사의(思議)의 사이에서 이를 요량하여 깊은 문호와 방구석을 연구하지만 끝내 이를 직접 보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혹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좋아하여 갑제(甲第)에 들어가는 일을 가지고 ‘갑제가 이렇게 얕고 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어 별도로 문경을 열어서 서로 다투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이쪽에서는 실중(室中)에 기둥이 몇 개라는 것을 말하고, 저쪽에서는 당상(堂上)에 용마루가 몇 개라는 것을 변론하여 쉴 새 없이 서로 비교 논란하다가 자신의 설(說)이 이미 서린(西隣)의 을제(乙第)로 들어간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면 갑제의 주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르기를,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
고 한다.
대체로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론(空論)을 숭상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진실한 것은 의당 강구하고 헛된 것은 의거하지 말아야지, 만일 그윽하고 어두운 속에서 이를 찾거나 텅 비고 광활한 곳에 이를 방치한다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여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방도는 굳이 한(漢)ㆍ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굳이 정현(鄭玄)ㆍ왕숙(王肅)과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으며, 굳이 주희(朱熹)ㆍ육구연(陸九淵)과 설선(薛瑄)ㆍ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이 다만 심기(心氣)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장하여 해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도 요상한 음식 설하멱적雪下覓灸 (0) | 2021.11.09 |
---|---|
소사蕭寺, 소씨네 집 (0) | 2021.11.08 |
난수표 부賦 (0) | 2021.11.07 |
인광노引光奴, 성냥개비 (0) | 2021.11.04 |
면역을 말한 갈홍 (0) | 2021.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