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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왕궁 왕릉 종묘 사찰을 하나로 묶는 그랜드디자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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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 대한 이해의 출발은 왕궁이다.
왕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왕릉이 안보인다.

둘은 왕이 거주하는 집이다.
나와바리가 다를 뿐이다.

왕궁은 살아있는 왕의 독점적 구역이요
왕릉은 죽은 왕들의 조차지다.

이 둘이 만나는 접점이 종묘다.
종묘는 두 가지를 한 군데로 봉합한다.

이런 이해는 사찰에 대한 그것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사찰은 부처님의 집이다.



삶과 죽음, 서로의 존재를 규정한다.



그 집은 불교 도입 초창기엔 생전의 집(대웅전)과 사후의 집(탑파)가 착종하다 고려시대 이후엔 급속도로 대웅전 중심으로 재편한다.

탑은 사라졌는가? 대웅전으로 통합됐을 뿐이다.

탑이 애초에 중국에 상륙했을 적에 그것을 원묘圓廟와 같은 용어로 번역하곤 했으니, 이는 탑파가 지닌 원초적 의미가 추모에 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런 廟로서의 탑파가 훗날 대웅전 하나로 통합되었을 뿐이다. 

탑파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 태어난 대웅전은 廟이면서 墓다. 

그런 까닭에 왕궁, 왕릉, 종묘, 사찰은 하나로 꿰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를 하나로 관통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그 화살을 쏘았다. (2014. 5. 31 글을 보완 전재한다.)  

 
***

이는 대성전 향교 서원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이들은 저들 중에서도 실상은 탑파 소멸 이후 대웅전에 가까워 生과 死를 하나의 공간에 통합한다.

강당이 대표하는 生者의 공간은 전면에 둔 채 廟는 언제나 죽음이 지배하나, 그 방향은 언제나 생자들이 북면하고는 배알 조알을 받는 남면南面을 한 채 북쪽 정중앙을 차지하는 까닭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저들을 모조리 한 묶음하고는 그것을 관통하는 분모를 일찍이 일러 그랜드디자인이라 했으니, 이 그랜드디자인 줄기를 잡느냐 마느냐는 동아시아 문화사 사활이 걸린 문제다. 

지금까지 저 분야는 이른바 학문 분파로도 따로 놀아 건축학은 껍데기만 부여잡고서 헛소리를 일삼았고, 역사학은 역사학대로 또 지들이 아는 헛소리만 늘여놓았다.

또 지들끼리도 따로 놀아 종묘하는 놈은 종묘만 논하고 탑파하는 놈은 탑파만 논했다.

나는 건축학도니깐, 나는 역사학도니깐, 나는 탑파연구자니깐 하는 말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건 책임 방기이며 무식의 폭로다.

이걸 한 꾸러미로 꿰야 한다.

삶과 죽음은 상대를 존재케 하는 절대기반이다. 삶 없는 죽음 있겠으며 죽음 없는 삶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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