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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에게는 많은 여인이 있었지만 우리 생각처럼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지는 못했다.
좋은 날짜를 잡고 하는 따위는 기본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왕비나 후궁이 달거리 중인지 아닌지는 매우 중요했다. 달거리 중인 여자와의 섹스는 금기였던 까닭이다.
달거리 체크는 주로 상궁 이하 여관들이 했는데
이놈의 조선시대 기록에는 이런 대목이 거의 혹은 전연 보이지 않는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조선에 그런 체킹 시스템이 없었느냐?
우리는 이에서 바로 동아시아학을 해야 하는 소이를 발견한다.
중국기록 일본 기록을 보면 바로 우리가 궁금해하던 기록이 있다.
중국 사례를 보면 그날 왕비와 후궁의 월경月經 여부는 저녁에 체크해서 바로바로 보고가 이뤄졌다.
내가 항용 이야기하듯이 중국기록 일본기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한국사 기록이다. (2014. 8. 26)
***
조선시대 월경 문화 일단과 관련해 아래와 같은 글이 보인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3_0070_003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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