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강동육주를 심판한다] (1) 거란 중심주의 시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
반응형

고려거란전쟁에서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가 언제나 매개 변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했거니와, 

하지만 이 강동6주라는 말은 근대 역사학이 만들어낸 데 지나지 아니하고, 무엇보다 고려 측 기록, 곧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아도 州는 가당치도 않고, 변방 군사 요새 지역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니, 그보다는 성城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해 이해하는 편이 옳다. 

더구나 내용을 뜯어보면 6주가 아니라, 거란에서 할양받은(엄밀히는 거란 묵인 하에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얻은) 땅에다가 8개 성을 설치한 것으로 문헌에는 보인다. 

앞서 나도 지적했듯이 이 강동육주라는 말이 여러 모로 당시 두 나라 사이 국제관계를 설명하는데 편리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 해서 편리하다 해서 퉁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근대 역사학은 강동육주라는 말을 만들어냈을까? 

예서 유의할 점은 저 말은 강 동쪽에 있는 여섯 개 고을이라는 뜻이라, 이 경우 강은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당시에 이미 압록강이라 불렀다. 

고려 기준이라면 개성을 기준으로 명명해야 할 법한데, 저 강동육주는 실상 거란 중심주의 시각이 농후한 말이다. 그래서 저 강동육주라는 표현은 적어도 고려사 주체 시각을 표명한다면 버려야 한다. 

고려 기준으로 서쪽 변경을 논하는데 어찌하여 가당치도 않게 동쪽이란 말인가? 

저 말이 굳이 의미가 고려 측 시각으로 있으려면 강서江西육주라 해야 한다. 예서 기준이 되는 강은 당연히 청천강 혹은 그 지류로 꽤 규모를 자랑하는 대령강이다. 왜? 이른바 강동육주는 압록강과 청천강 혹은 대령강 사이에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강동 육주라는 말을 냈을까? 

외우 홀애비 기호철 선생에 의하면 강동육주라는 말은 두계 이병도가 1923년 동아일보에 《조선사개강朝鮮史槪講》을 연재하면서 쓰기 시작했다는데, 요사遼史에 보이는 詔復取六州地 라는 구절과 江東 이라는 말을 결합해 만들어 쓴 용어로 추정된다고 한다.

 

*** related articles *** 

 

서희와 강감찬, 그 공통분모 강동6주

 

 

서희와 강감찬, 그 공통분모 강동6주

두 사람은 막연히 한 세대 정도 차이나는 줄 알았지만, 실제 생몰년을 비교하면 서희徐熙가 942~998년이고 강감찬姜邯贊은 948~1031년이라 불과 여섯 살 차이라, 실상 같은 시대를 호흡했다. 두 사람

historylibrary.net

 

강동6주? 서희가 강제로 탈취했지 거져 얻은 것이 아니다

 

강동6주? 서희가 강제로 탈취했지 거져 얻은 것이 아니다

저 강동육주江東六州라는 말은 전통시대 사서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이 못내 옛날부터 미심쩍기 짝이 없었지만, 그런 대로 저 시대 역사를 설명할 때는 편리한 점이 많아

historylibrary.net

 

 

강동육주와 대령강장성

 

강동육주와 대령강장성

흔히 강동육주의 획득으로 압록강선까지 진출했다고 하는데 강동6주를 얻기 이전의 고려와 거란, 혹은 여진과의 경계선은 어디었을까. 이것은 맨땅에 그어진 것이 아니라 이것 역시 강을 경계

historylibrary.net

 

 

강동육주, 고려거란전쟁의 최대 변수

 

강동육주, 고려거란전쟁의 최대 변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그 대미라 할 3차전을 향해 치닫는다. 그 전쟁의 야합이 이른바 강동6주였으니 이후 전쟁과 그 간헐 기간 내내 두 왕조는 이 강동육주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긴장을 연출

historylibrary.net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