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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일본을 짬뽕한 빈센트 반 고흐 초상, 탕귀영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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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가 한국에서도 전시를 한 모양이고, 뭐 고흐라면 죽은 사람도 벌떡 일으키는 형국이라 그의 이름 내건 전시는 실패를 모르는 흥행 보증수표라, 국내 전시 또한 인산인해를 이룬 것으로 알기는 하지만, 나는 인연이 없었으니

미술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내가 이런 그림이 어디있는 줄 어찌 알았으며, 로댕박물관 갔으니 로댕 작품만 있는 줄 알았지, 그것 말고도 다른 작가 그림들이 있는 줄은 또 어찌 알았겠는가? 

발길 닿은 대로 가다 보니, 요상한 그림이 보여 어? 이건 고흐인데 하면서 보는데 느닷없이 그의 그림 몇 점이 걸려있어 봐줬을 뿐이다. 

나는 열라리 편하게 봤는데 사람에 치여 본다고 고생한 고국의 동포들이 괜히 불쌍하다.

같은 그림도 어찌 포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모양이라 고흐고흐하지만 사방팔방에 널부러진 게 고흐 그림이다.

아무튼 이 그림을 보며 두 가지가 위선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첫째 제작 시점, 둘째 소장 내력이 그것이라

이를 위해 위선 뮈제 로댕 Musée Rodin, 곧 로댕박물관 Rodin Museum이 파리에 자리잡게 된 내력을 주시해야 하거니와, 이 박물관은 자신의 작업실과 관련 작품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1919년 문을 열었으니, 1840년 생인 그가 사망한 시점이 1917년 11월 17일인 점을 고려할 때 죽으면서 관련 작품 일체를 국가 기증하지 않았나 싶다. 
 

원산폭격을 좋아한 로댕

 
이런 그의 출생시점과 사망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기라성을 방불하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과 대략 겹친다는 사실이다. 인상파라는 말을 만들어낸 결정 빌미를 제공한 클로드 모네가 그와 같은 해 태생이며, 1853년 생인 고흐보다는 열세살이 많다. 

같은 프랑스, 것도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했으니, 교유 또한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케 하거니와, 실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리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기증품 목록에는 Vincent van Gogh는 물론이고 Claude Monet, 그리고 르느와르 Pierre-Auguste Renoir 그림 역시 포함됐으니, 로댕박물관에는 이런 그림 몇 점이 내가 찾은 날 상설전시 중임을 보았다. 이게 다인지 수장고에 더 쳐박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 많을 것이다. 
 

미술계 포샵의 개척자 고흐

 
다음으로 이 탕귀영감 초상을 고흐가 제작한 시점이 문제라, 이를 위해 위선 이 작품 족보를 정리하면 먼저 제작 시점은 1887년이며, Medium Oil on canvas라 유화라는 뜻이라 그냥 지나가며, 크기는 65.0 cm × 51.0 cm (25.6 in × 20.0 in) 라 한다. 초상으로는 중형급 정도 크기라 할 만하다. 

나아가 Le Père Tanguy, 곧 Portrait of Père Tanguy, 탕귀영감 초상이라는 제목은 그 자신이 붙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탕귀 Tanguy가 누구인지는 제껴두고, 프랑스 냄새가 완연한 이름이라는 인상을 받으니, 그에다가 왜 굳이 Père 라는 수식어를 붙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 말은 영어 father과 맥락을 같이하는 단어로 하는데, 아버지 부친이라고 하지만, 여러 갈래가 있어, 춘부장이라는 맥락도 가능한듯한데, 국내에서는 탕귀영감이라 번역한 내력도 분명 있으리라고 본다.

실제 그 등장 인물 양상을 보면 딱 촌로村老 딱 그것이지만, 그렇다고 돈도 안 되는 어느 시골영감을 고흐가 그렸을 리는 만무하고, 뭔가 내력이 있기는 할 것이로대

이를 보기 전에 위선 저 초상 제작 무렵이 고흐가 조국 네덜란드를 떠나 막 파리에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거니와, 1886년 반 고흐는 영원히 네덜란드를 떠나게 된다.

파리에서 주로 활동하는 아트 딜러인 동생 Theo와 함께 파리에 정착하고는 1888년까지 그곳에서 보내게 되는 고흐는 당시 파리를 휩쓴 인상파라든가 상징주의 미술, 나아가 무엇보다 자포니즘 Japonisme 세례를 짙게 받는데, 그 단적인 영향이 저 초상에 드러난다.

특히 일본 우키요에 화가들인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1797~1858)와 가쓰시카 호쿠사이 [葛飾北斎, 1760~1849] 한테서 미술의 새로운 방향을 보게 되는데, 저 탕귀영감 초상은 그가 새로운 미술을 실험하는 온갖 잡동사니는 다 쑤셔박은 증언이다.

인물만 프랑스 영감이지, 그 배경은 온통 일본 미술, 구체로는 우키요에 짬뽕이라, 심지어 정수리 부분에는 후지산이 보이기도 한다. 

우키요에 어떤 점에서 서양미술이 환장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지적질이 있거니와, 내가 볼 때 그런 지적질 중 어느 한 군데서도 동의할 부분이 없고, 딴 거 없다, 나는 그네들이 우키요에서 사진에서 미술이 살아남을 희망을 봤다고 본다.

고흐 고갱보다 한 세대 뒤지는 모딜리아니(1884~1920)는 길쭉이로 돌아서는데, 그 길쭉이 초상은 다름 아닌 아프리카 예술에서 모티브를 땄다는 지적질을 했거니와, 모딜리아니는 불쌍해서 선배들이 이것저것 다 써먹고 남은 마지막 뼈다귀 사골을 하나 건졌으니, 그것이 아프리카였다. 

남들이 주목하지 못한 제3세계, 혹은 원시미술 탐색도 끝나고 나니, 더는 써먹을 것이 없다 해서 칸딘스키류 추상이 등장하고, 야수파니 입체파니 하는 시대를 거쳐 요새는 도대체 그린 놈이 해설하지 않으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 감조차 잡기 힘든 완전 추상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흐름은 결국은 나는 사진과의 쟁투로 보는데, 미술은 그 태생과 내력, 곧 존재가치를 누가 뭐라 해도 초상으로 삼는데, 사진의 등장은 그만큼 초상을 기반으로 삼는 기성 미술에 대한 일대 타격이었고 붕괴였다. 

저 초상에서도 사진을 향한 불안한 저항이 있다고 나는 본다. 살피면 고흐는 사진이 포착하지 못한 것들을 일부러 쑤셔박았다.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합성으로 본다. 요새 유행하는 말을 빌리면 딱 뽀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그의 실험도 이제 한 세기가 흘러 진짜로 사진이 만능하는 시대로 갔으니, 뽀샵 한 방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기술이 없으니, 심지어 극추상도 사진이 잠식하는 시대라, 미술은 결국 사진 등장 이후에는 끊임없는 사진과의 쟁투를 벌이는 시대이니, 결국 그 생존 전략은 사진이 포착할 수 없는 방향 모색이라 정리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사진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서 일부에서는 전선이 결국 굴복하기도 했으니, 그런 사진더러 이제 고만 외곽에서 우리 때리고 그만 우리 안으로 들어와라 해서 겉모습으로는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지만, 결국은 잡아먹히기는 시대가 되었으니, 갤러리들 치고 사진전 안 하는 데 있음 나와보라 그래! 

잉? 내가 본래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었는데 옆길로 너무 샜다. 미안하다 독자들아. 

이제 탕귀영감도 김이 새어버러 듣자니 이 초상은 고흐가 제작한 탕귀초상 석 점 중 하나라는데 암튼 그렇대니 그런 줄로 알고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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