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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마지막> (2) 황족령皇族令에 따른 각종 특혜를 받은 이왕가

by taeshik.kim 2021.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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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2 15:33:52
<조선왕실의 마지막 운명과 이구씨의 삶>(2)


구체적으로 보면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은 1910년 8월 29일 이후 1926년 4월 25일에 사망할 때까지 '이왕'(李王) 신분으로 있었다. 허울뿐이긴 했으나, 그는 여전히 명목상 조선의 왕이었다. 그는 주로 창덕궁에 거주했기 때문에 '창덕궁 이왕 척'(昌德宮李王拓)이라 일컬어졌다. 

 

영친왕 이은. 순종 사망 뒤 그는 당당한 조선왕조의 왕이었으며, 각종 특혜를 받았고, 죄를 지어도 함부로 잡아가지도 못했으며, 총독 이하 관리들이 그를 알현해야 했다. 

 

반면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된 그의 아버지(고종)는 왕의 아버지라고 해서 태왕(太王)이라 했으며, 주로 덕수궁에 거주했으므로 '덕수궁 이태왕희'(德壽宮 李太王熙)라고 했다.

 

순종 사망 뒤 이왕(李王)이라는 칭호는 그 계승자에게 세습되었다. 그가 바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며 고종의 아들인 이은(李垠)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각인된 고종의 아들이요, 순종의 계승자인 이은(李垠)에게 익숙한 칭호는 영친왕(英親王)이다. 도대체 이왕(李王)으로서의 이은(李垠)과 영친왕으로서의 이은(李垠)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이를 추적하기 전에 먼저 이은의 궤적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종이 순빈(淳嬪) 엄씨(嚴氏)에게서 낳은 이은은 1900년에 영왕(英王)에 책봉된다. 이때 조선은 황제국을 선언해 있었으므로 왕자와 왕손을 왕(王)으로 책봉하니, 이 과정에서 이은은 영왕(英王)이라는 칭호를 아버지에게서 하사받은 것이다.

 

고국을 방문한 영친왕 이은. 그는 조선의 왕이었다. 그 권위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다. 

 

이어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하자 황태자에 책립됐다. 현 황제의 이복동생이므로 엄밀히는 황태제(皇太弟)라고 해야 할 것이나 이런 편법이 조선왕조에서 시도되기도 했다.

 

황태자 책봉 직후인 1907년 12월, 이은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이끌려 11세에 일본에 건너가 교육을 받았으며 1920년 4월 28일에는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 장녀인 마사코(方子)와 결혼하게 된다.

 

1926년 순종의 죽음과 함께 이왕(李王)을 세습한 그는 도대체 어떻게 친왕(親王)이 되었으며, 친왕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아이가 이구 아닌가 싶다. 이방자와 이은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1926년(다이쇼<大正> 15) 11월 30일에 황족령(皇族令) 제17호로 공포된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이라는 법령과 마주하게 된다. 왕공(王公)에 대한 각종 특권을 규정한 법률로써, 이를 중심으로 다른 법적인 근거들에 의해 이왕(李王)인 이은(李垠)을 비롯한 이왕가(李王家) 일족은 다음과 같은 특권이 부여됐다.

 

첫째, '황실보전'(皇室寶典) 제39조에 의해 황족(皇族) 여자와 혼인할 수 있었다. 황족 여자의 혼인 대상은 화족(華族. 일본의 귀족)과 조선의 왕공족에만 한정됐다. 흔히 이은이 이방자와 결혼한 사실을 일제의 의한 강제, 즉, 내키지 않는데  할 수 없이 이은이 이방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하나, 냉철한 접근이 필요하다.

 

둘째, 왕공가궤범 제19조에 의거해 이왕은 전하(殿下)라는 칭호를 받았다.

 

셋째, 같은 법률 제12조와 39조에 의거해 조선의 왕공족은 천황과 그의 비인 황태후 등을 조견(朝見)할 수 있었다. 이은을 비롯한 조선의 왕공족은 사실 천황을 조견할 수 있는 특권을 실제로 빈번이 행사했다. 이 때문에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총애를 받은 인물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사실을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는다.

 

넷째, 사법상 특권이 부여됐다. 천황의 허가 없이 사법 당국에 구속되거나 소환되지도 않았다(왕공가궤범 제28조와 30조). 

 

다섯째, 학교 취학의 특권도 주어져 황족과 마찬가지로 학습원(學習院)과 여자학습원(女子學習院)에 입학할 수 있었다.(왕공가궤범 제37조).

 

이밖에도 조선의 왕공족은 신분에서 황족(皇族) 다음이었고, 일본 전래의 귀족인 화족(華族)보다도 상위였으며(왕공가궤범 제40조), 각종 훈장을 받을 특권이 주어졌는가 하면, 왕과 왕세자, 왕세손, 공(公)은 만 18세가 되면 육군이나 해군의 무관에 임용됐다. 

 

이방자 가족, 그의 친가는 영친왕가의 결혼을 통해 가문의 격이 더욱 상승했다. 왜? 사돈이 열라 부자였으니깐 말이다. 

 

이은이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까지 이른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일반에 통념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식민지 기간에 조선왕실이 핍박만 받았는가, 아닌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선악(善惡)의 시각을 뛰어넘어 냉정하게 이런 현실들을 직시해야만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적어도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왕실 일족들이 식민지 통치기간에 누린 각종 특권에 대해서는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작성자 김태식)

 

taeshik@yna.co.kr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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