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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중인中人, 특권의 가교 or 특권의 다른 이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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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관상감 관원 80%, 혈연 네트워크 얽혀"

송고시간 | 2019-10-27 12:22

나영훈 한중연 교수 '운관선생안' 등 자료 분석


관상감이 취급한 관상학은 권력의 독점이었다.



이걸 통계수치로 환산했다는 데 자못 의미가 있다고 나는 본다. 

조선시대 문집 같은 글을 보면, 요즘의 테크로크랏에 해당하는 중인 특수전문집단을 보면 특정한 가계가 계승하는 노골하는 모습을 본다. 


이는 지금의 통역관 혹은 동시통역에 해당하는 역관譯官도 마찬가진데, 독점이라 할 정도로 특정 가문 쏠림현상이 강하다. 


본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는 고도의 전문성 때문이다. 이 전문성을 곧 배타성과 같은 말이다. 배타성과 결합한 전문성은 강고한 그들의 왕국을 구축하는 힘이다. 다른 가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독점 현상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에서 두번째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 독점성 배타성이 곧 권력과 돈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그 독점 배타하는 분야가 돈과 권력이 되지 아니하는데 어떤 가문이 그것을 계승한단 말인가? 이 부문을 저 논문이 어떻게 짚었는지는 내가 직접 그 글을 소화한 것은 아니라서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조선은 강고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에서 중인층은 시종일관 양반층에 핍박받은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전연 딴판이라, 실은 이 중인층이 조선이라는 국가, 사회 전체를 말아먹다시피 했다. 그만큼 중인층이 차지하는 위치가 막강했다. 


이 논문은 현재의 기상청 정도에 해당하는 관상감 관료들을 들었고, 나는 역관을 추가했지만, 중인층은 곳곳에 포진했으니, 그들이 없는 분야가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중인이 관여하지 않는 분야가 없었다. 사람이 죽어도 곳곳에 이 중인층이 포진했다. 


권세가에서 초상이 나면, 그에 동원하는 중인층은 실로 막강해서, 상가에서 음식을 지어 나르는 일도 이런 일을 전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무덤을 쓰는 데도 지관으로 대표하는 풍수가가 없을 수 없었으며, 묘비를 세우는데도 그 돌을 만들어 공급하는 직업이 따로 있고, 그에다가 글씨를 새기는 사람도 따로 있었다. 실은 이들이 이들 권세가를 쥐고 흔들었다. 


맘에 안 들면, 걸핏하면 공기를 늦추거나, 하품의 돌들을 공급했으니, 내가 이런 돌을 이런 규격으로 주문했는데, 막상 그보다 크기도 작고 조질인 돌삐가 와서 곤혹스러웠다는 조선시대 기록이 부지기로 넘쳐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특히 이 중인층에 나라가 놀아났다. 이들은 모름지기 중인층이 독점하는 실무관료를 공급하고 그것을 독점하는 특권층이었으니, 우리한테는 변학도가 나쁜 놈이지만, 실은 변학도를 조종하는 아전으로 대표하는 중인층 관료들이 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중인층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나는 신라사와 관련해 매양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상대등이니 시중이니 병부령보다 대나마를 주목할 것을 제창하곤 한다. 이 대나마는 17계로 나뉜 신라시대 관품에서 고작 10등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은 이네들이 막강한 권능을 지녔다. 관부는 이들에 의해 돌아갔으며, 이들의 입맛에 따라 움직였다.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저 관위체계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는 사람들을 주목할 것을 제안한다. 대사니 소사니 하는 그들이야야말로 중앙관부의 수족이었으며, 향촌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뿌리였다. 


중인층이 이만치 중요하다는 말은 많이 봤고, 실제 이 중인층에 착목한 적지 않은 연구가 보이기는 하더라만, 글쎄, 내가 생각하는 그 중인층에 접근한 연구는 나는 아직 보지 아니했다. 고작 한다는 연구가 역관이 해외무역을 독점했고 그에서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는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중인층 연구는 멀었다고 본다. 


저 권세가 퇴계를 갖고 논 것도 중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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