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15년이 넘는다. 애초 시작은 불교 사리장엄이었다.
불교건축물을 발굴하면 건물터 마루 바닥이나 담장, 특히 탑을 발굴하거나 해체하면 모름지기 무엇인가 그 건축에 수반하는 흔적들이 실물로 확인하거니와, 개중에서도 땅에 묻은 것, 특히 구덩이를 파거나, 그렇게 판 구덩이에다가 항아리나 철솥 같은 데다가 불교 공양구 같은 물품을 잔뜩 넣은 놓은 장면을 자주 보는데
이를 고고학도들이 이렇다 할 문제도 없이, 또 주로 일본고고학에서 그리 말하니 줏대 없이 그것을 한번도 의심치 아니하고서는 땅의 동티를 막기 위한 지진구地鎭具니 진단구鎭壇具니 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도 많이 늘여놓기에 그것이 아니라는 말을 주구장창 했으니
나로서는 그 피크를 이룬 분노가 2009년인가 2007년 무렵인가 부여 왕흥사지 탑 주변 발굴 공양품을 분석한 단국대 문화사학 논문이었다.
이는 불교공양구로서, 탑파 기공 혹은 준공에 즈음해 그 의식에 참여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품을 부처님께 공양한 물품이라는 주장을 나로서는 매우 설득력 있게 전개했거니와, 그러면서 나는 지진구 진단구 하는 개념들은 근거도 없다는 말을 매양 했다.
내가 하도 이 문제를 계속 지적해서인지, 그것을 의식했음이 분명하다고 나는 보는데, 어느 고고학도가 근자 어떤 잡지에다가 그것을 전론으로 탐구한 논문을 게재했던데, 아마 국립기관 관련 기관지 아니었나 싶은데, 보다가 짜증나서 찢어버렸다.
그 헛소리 만악의 근원은 일본 중세시대에 나온 불교 관련 위경僞經 한 줄에 근거하는데, 그것이 무슨 권리장전이나 되는양 매양 진단구 지진구를 논급하는 놈들은 그것이 적힌 맥락도 모른채 앵무새처럼 진짜로 그것이 지진구 진단구라는 주장을 묵수하는 것이 아닌가?
그 무렵 나는 불교건축을 벗어나 신라시대 이래 일반 주거지 혹은 관청 건물터 주변에서 무수히 출토하는 이른바 진단구 지진구 때려부수기 작업도 펼쳤으니,
내가 특히 이상한 대목이 조선시대 서울 사대문안 무수한 이른바 지진구 진단구는 물론이려니와, 통일신라시대 비슷한 양태로 간주하는 유물들이었다.
그건 아무리 봐도 태항아리지, 결코 지진구 진단구가 될 수는 없었다. 그 양태를 보면 천상 태항아리지, 저것들이 어찌 지진구 진단구라는 귀신 씻나락이 된단 말인가?
나는 이전에는 못내 김유신 태실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돌발이었던 까닭이다. 왜인가 하면 태실은 관련 기록이라든가 고고학 실물로써 명확히 확인된 것으로는 김유신 태실 말고는 고려말, 조선초기가 가장 빠른 까닭이었다.
조선건국시조 이성계 태항아리를 보면 그는 고려시대 사람인 까닭에 분명히 고려말기에는 태를 묻는 전통이 있었음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막강한 이규보 문집에도 태에 관한 논급을 보이지 않아 못내 의심스러웠다.
그러다가 20년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시점, 나는 마왕퇴에 매진하게 되었거니와, 그에서 태산서胎産書라는 문헌을 마주하고, 그에서 태를 묻는 전통이 있음을 보고는 기절초풍하고는 그래 이거다 싶었으니,
이 또한 매양 하는 말이지만 나는 동아시아 문화권 설정에서 낙랑을 개좆으로 보는 사람이라, 무슨 외부와의 교류라 했다하면 너도나도 낙랑 탸령이라,
낙랑이 유일한 창구도 아닐진댄, 왜 너희들은 낙랑에 환장하느냐 하면, 내가 참말로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던 반응 중 하나로 입만 열면 낙랑 낙랑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이제 우리 학계도 낙랑 일변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말을 보고는 기가 차고 똥이 찼다.
하는 꼬라지는 맨 낙랑 타령이면서, 낙랑을 벗어났다니? 이런 개소리가 있단 말인가?
내 보기엔 낙랑이 어느 정도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분명하지만, 동아시아 문화권 설정에서 절대 가늠자는 될 수 없고, 그보다는 이 동아시아문화권은 한반도를 기준으로 중남부와 그 이북이 뚜렷이 갈리는데, 중남부의 경우 문화권은 중국 대륙의 장강 유역과 그 이남, 한반도 중남부 그리고 일본열도 중남부를 아우르는 문화벨트 설정이 가능하다.
이 문화벨트를 무엇이라 이름해야 하는지 나로서는 아직 고민이지만, 이 문화벨트는 내 보기에는 선사시대 이래, 아무리 늦어도 삼국이 태동하기 직전 이른바 삼한시대에는 확고히 자리를 잡았으니, 그리하여 이 문화권에서는 여러 가지 문화를 공통으로 삼게 되는데, 개중 하나가 바로 이 안태 장태 문화다.
마왕퇴에서 마주한 안태 전통을 조사하다 보니, 중국에서는 이상하게도 장강을 중심으로 그 이남 지역에서 집중으로 유행했음을 확인하고는, 이거다 싶었다.
이건 중국에서 들어온 것도 있겠지만, 나는 현대적 개념의 국경을 거부하는 까닭에 문화벨트라는 개념으로 대체한다.
아무튼 김유신 태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만사가 형통해졌고, 그에 따라 고고학도들이 지진구 진단구라 부르는 상당수가 실은 태향아리임을 직감했고, 그에 따라 그런 주장을 줄기차게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고고학 찌꺼기, 일본고고학 말류인 지진구 진단구는 생명을 다했다. 이제 끝났다. 익산에서 결정타 맞고 꼬꾸라졌다.
이제 한국고고학은 헛소리 잔치 청산하고, 사과문 발표해야 한다.
무식한 우리가 대국민 개사기 쳤노라는 사과문 게재해야 한다.
*** 붙임 ***
이 포스팅이 고고학이 지진구 진단구로 간주하는 모든 유물이 태항아리라는 등식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 볼 소지도 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 글의 대의는 지진구 진단구 그 자체가 근거가 전연 없다는 것이며, 그래서 그걸 나는 부정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거라고 주장한 지진구 진단구 중 상당수는 태항아리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지진구 진단구가 태항아리겠는가?
사찰 발굴에서 나오는 것들로 지진구 진단구라는 것은 저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진구 진단구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고, 실제는 부처님을 위한 공양품이다.
따라서 한국고고학이 지진구 진단구라 판정한 것은 오진이며, 이 오진은 책임져야 한다.
혹 저 중 일부가 지진구 혹은 진단구로 밝혀진다손 쳐도, 장님 코끼리 손을 만진 격이라, 그거 하나가 용케 맞았다 해서 그 책임을 면탈할 수는 없다.
지가 채점한 점수는 백점이었는데, 개중 한 문제 맞아서 1점을 얻었다 해서, 백점으로 채점한 책임을 결코 면탈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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