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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진한秦漢의 유적 vs. 진한시대의 유적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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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秦漢의 유적과 진한시대의 유적은 반딧불과 번갯불의 차이다.

전자는 진秦나라 혹은 한漢나라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고 운영한 유적이란 뜻이요

후자는 진나라 혹은 한나라가 존속한 시기에 만들고 운영한 유적이란 뜻이다.

우리가 아는 중화주의는 일부러 이 둘을 같은 것으로 혼용한다.

지금의 중국 경내에서 일어난 모든 고고학적 증거를 이 틀에다가 끼워넣어 버린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보기가 남월국南越國 유적이다.

광동성 광주에 가 보면 모든 남월국 유적지 간판을 서한남월국西漢南越國 이라 표기했다.

한데 이 둘을 곧잘 한국고고학도들도 구분하지 못해 왕왕 중화주의 논리에 함몰한 모습을 보이니,

산해관 동쪽 진황도秦皇島와 수중현綏中縣 일대에 출현한 소위 진시황 한무제 행궁行宮 유적을 의심하는 사람을 거의 만나보지를 못했다.

 

저기를 진 시황제나 한 무제가 행차했단 말인가? 듣도보도 못한 말이며, 실제 사기 한서 어디를 뒤져도 그 둘이 저길 단 한 번이라도 갔다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저짝에서 발견되는 진한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을 소병기 이래 중국 역사고고학계는 저들의 행궁行宮이었다는 헛소리를 늘여놓고 있다. 더 처참한 것은 그런 밑도끝도 없는 주장을 무턱대고 국내 역사학도연한 자들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그리 주장하면 그걸 받아들여? 비판력은 도대체 어디가 팔아먹었는가?

 
내가 줄기차게 주창하듯이 저 일대에 진 시황제나 한 무제漢武帝가 행차했다는 기록이 단 한군데도 없다.

나아가 진나라와 한무제 이전 서한이 저쪽 일대까지 진출한 흔적도 그 어디에도 없다. 

그에서 출현한 유구 유물이 완연한 중국풍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진한의 흔적으로 볼 수는 결코 없다.

저들 행궁은 진한에서 발라내고 진한시대의 유적으로 제위치시켜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의 주체를 궁구해야 한다.

중국 당국에서 그 발굴보고서를 몇년 전에야 마침내 공간했다.

이를 보면 제법 많은 진한시대의 문자자료가 출현했다.

그 문자 자료들 본 적 있는가?

분명히 한자인데 나는 단 한 글자도 알아볼 수 없더라.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이것이 진한의 유적이라면 하다 못해 그 시대 관직 이름이라도 보여야 정상이다.

한데 그런 것은 단 한 점도 없고 수수께끼 같은 글자들만 수두룩빽빽하다.

그것이 진짜로 진한의 유적이라면 이런 현상이 있을 수 있는가?

없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저들 행궁 유적이 진한의 유적이 아니라 진한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라는 단적인 증거다. (2016. 6. 5) 

 
***


이 둘을 혼동하면 공주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중국 남조시대 전축분이 되어 버린다. 

내가 매양 이야기하는 남월국 유적 보면, 동시대 완연한 진한시대 유물로 그득그득하다.

만세 와당은 물론이요 그 왕릉이 발굴되었는데 동시대 중원 지역에서 흔해 빠진 금루옥의金縷玉衣를 걸쳤다.

이것만 보면 이는 남월국 유산이 아니요 진한시대 그들이 남긴 유산이다. 

넋을 빼면 그렇게 본다. 

진한 색채가 농후한 유물 유적이 출토된다 해서 그것이 진한이 남긴 것이라는 망발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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