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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참을 수 없는 치통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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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존경하는 강명관 선생님의 포스팅에 따르면, 옛 어른들은 어지간히 치통을 달고 사셨다.

고려 말 이색(1328-1396)부터 치통을 시의 소재로 다루기 시작했고(물론 그 전부터 있었을 테지만), 조선시대 기록을 봐도 아무개가 치통을 앓았다는 이야기는 적지 않다.

영조는 20대부터 치통을 앓다가 70대쯤 되니 윗니가 하나만 남았다던가. 어쩌면 영조의 성격에 치통이 한몫 단단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내용 중 재밌는 게 하나 있었다. 치통이 하도 심해 결근한 유건기兪健基라는 양반이 대장장이를 시켜서 이를 뽑으려다가, 그나마도 실패했단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 판서까지 지낸 윤유 이런 분들도 대장장이의 집게로 이를 뽑았는데, 썩 솜씨가 좋지 못했던지 뺨에 구멍이 나질 않나, 턱에 흉터가 생기질 않나, 하여간 다들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서양 중세의 이발사나 정육점 주인처럼, 조선의 대장장이도 부업으로 치과의사를 겸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오죽이나 이가 아팠으면 그네들이 천시하는 대장장이에게 이를 맡겼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럴 정도였는데 왜 치과 전문 의원을 육성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든다.

뒷날 고종이 홍합을 잘못 씹어 이가 부러지자, 미국인 치과의사를 불러 일종의 임플란트 수술을 했다는 얘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 台植補 ***

다섯 가지 복 중에 성한 이빨이 든 이유는 치통을 앓은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한다.

다만 전근대에 견주어 비약적인 의학 발달에 힘입어 치통 극복이 수월해진 까닭에 치통이 차지하는 고통의 위치가 급속히 쇠락하는 바람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할 뿐이다.

이 치통이 얼마나 심각한 삶의 고통인지는 각종 약학서에 수록된 치료약을 보면 대번에 아는데 신농본초경이던가 그걸 보며 내가 일찍이 일일이 통계표를 낸 적이 있는데

단연 1등이 치통 치료제였다.

그만큼 치통은 고통이었다.

가장 흔한 치료제가 버드나무 껍질이었다.

나는 불화 중에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양류관음이 발달한 이유 중 하나로 치통을 꼽기도 한다.

강군이 말한 강명관 선생 논급이 무엇인지 확인치 못했지만 나는 한의학서를 자주 보는 사람으로써 치통이 차지하는 막중함을 더는 방기할 수 없음을 절감한 터라 마침 관련 글을 강군이 탈초했기에 두어 마디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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