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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피임? 누구 맘대로? 왕건을 거역한 나주 촌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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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 제88 열전 제1 후비后妃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는 나주羅州 사람이다. 조부는 오부돈吳富伅, 아버지는 오다련군吳多憐君이니 (이 집안은) 대대로 나주의 목포木浦에 살았다.

오다련군이 사간沙干 연위連位의 딸 덕교德交한테 장가들어 왕후를 낳았다.

왕후가 일찍이 나루터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놀라면서 깨어 부모한테 말하니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오래지 않아 태조太祖(왕건)가 수군장군水軍將軍으로 나주에 출진出鎭하여 목포에 정박하면서 강가를 바라보았더니 오색五色 구름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곳에 이르니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불러 사랑을 나누었지만 측미側微(집구석이 볼품없음)하므로 임신해서는 안 된다 해서 잠자리에 깐 돗자리에 쏟았지만 왕후가 바로 이를 집어 넣어 결국 임신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가 바로 혜종惠宗이라

혜종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르기를 ‘주름살 임금[襵主]’이라 했다.

늘 물을 잠자리에 부어 두었으며 또 큰 병에 물을 담아두고 팔 씻기를 싫어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용의 아들이었다.

나이 7세에 태조가 왕위를 이을 만한 덕이 있음을 알았으나, 그 어머니가 미천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까 걱정하여 짐짓 옷상자[笥]에 자황포柘黃袍를 담아 왕후에게 내리니

왕후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였고, 박술희가 태조의 뜻을 미루어 그를 세워 정윤正胤으로 하자고 요청하였다.

왕후가 훙서하자, 시호諡號를 장화왕후라 하였다.

莊和王后吳氏, 羅州人, 祖富伅, 父多憐君, 世家州之木浦. 多憐君娶沙干連位女德交, 生后. 后嘗夢浦龍來入腹中, 驚覺以語父母, 共奇之. 未幾, 太祖以水軍將軍, 出鎭羅州, 泊舟木浦, 望見川上, 有五色雲氣. 至則后浣布, 太祖召幸之, 以側微, 不欲有娠, 宣于寢席, 后卽吸之, 遂有娠生子, 是爲惠宗. 面有席紋, 世謂之襵主. 常以水灌寢席, 又以大甁貯水, 洗臂不厭, 眞龍子也. 年七歲, 太祖知有繼統之德, 恐母微不得嗣位, 以故笥盛柘黃袍, 賜后. 后示大匡朴述熙, 述熙揣知其意, 請立爲正胤. 后薨, 謚莊和王后. 
 

침대 아녔을까? 저런 이부자리를 깔았을 때 나오는 무늬가 아닌가?

 
이에서 보듯이 장화왕후는 첩이었고, 집안이 다른 정비나 후궁들에 견주어서는 내세울 백그라운드가 없어 애를 먹었다.

장화왕후라는 이름도 죽고 나서 얻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왕건 생전에는 첩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왕건시대 고려 왕실이 일부다처제? 웃기는 소리다. 정식 마누라는 조강지처 한 명밖에 없다. 

그에게 기회가 온 것은 왕건의 조강지처이자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천궁柳天弓 따님인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가 왕자를 두지 못한 데다, 첩실로는 첫번째였던 까닭이다.

그에서 아들을 두었으니, 이 아들 왕무가 왕건으로서는 장자였다. 

그러니 자연 큰아들한테 왕위가 가야했지만 문제는 나주 촌놈 딸이라서 고려 왕실에는 이렇다 할 원군이 없다는 점이었다.

솔까 뭐가 있겠는가? 나중에서 그런 대로 살기는 했겠지만, 개경에서는 개털이었다. 

이런 그에게 원군은 박술희였다. 왕건 최측근 중의 최측근 박술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니, 이 연줄을 발판으로 자기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데 성공한 것이다.

피임을 피하는 방식도 그렇고, 박술희를 동원하는 방식도 보면 이 장화왕후 오씨는 야심으로 똘똘 뭉친 여인이다. 

저 기술을 보면 왕무는 물침대를 쓴 것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둘이 사랑을 나눌 적에 깐 침석寢席이 어떠하기에 그에서 태어난 아이 이마밖에 석문席紋이 있었단 말인가?

이건 온돌 방바닥이 아닌 듯하다. 침대인 듯하다. 이게 나로서는 몹시도 궁금하다. 웬 돗자리? 무르팍 까질 텐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저 대목이 다음과 같이 상당히 절록切錄되었다. 

혜종의공대왕惠宗義恭大王은 휘가 무武이고, 자는 승건承乾이라, 태조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이며,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912)에 태어났다. 오씨가 일찍이 용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가 나주羅州로 출진出鎭하였다가 보고는 사랑을 나누니 마침내 임신을 하였다. 장성하자 기상과 도량이 넓고 크고, 지혜와 용맹함이 뛰어났으며,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2년간 재위하였으며, 향년 34세다.

惠宗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莊和王后吳氏, 以後梁乾化二年壬申生. 吳氏嘗夢龍入懷, 未幾, 太祖出鎭羅州, 見而幸之, 遂有娠. 及壯, 氣度恢弘, 智勇絶倫, 從太祖征百濟有功. 在位二年, 壽三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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