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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황윤석黃胤錫이 읊은 장성 아치실 아곡鵝谷

by taeshik.kim 202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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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홍길동테마파크가 아차실이다>



〈아곡鵝谷〉


소곡小谷, 아차실이라고도 하고 제곡弟谷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아찬곡阿餐谷이라 부른다.

鵝谷【亦曰‘小谷、아차실’, 亦曰‘弟谷’, 或云‘阿餐谷’。】


조상님들 거치셨던 이곳 아치실은 

깊은 산속 골짜기로 마을 아늑하네

기수의 대나무엔 옛 그리움 남았고

마당의 눈에는 유학한 자국 쓰였네

쓸쓸히 잔약한 손자가 여기 있나니

멀고도 아득하니 너무도 오랜 세월

해는 뉘엿뉘엿 말을 몰아 떠나면서

가는 걸음걸음 자꾸자꾸 돌아본다


吾祖經行地, 山深里巷幽。淇竿留舊戀, 庭雪記曾游。寥落孱孫在, 蒼茫小劫悠。斜陽駈馬去,  臨路更回頭。


-첨정부군僉正府君께서는 이씨李氏 집에 장가들었고, 취은부군醉隱府君과 구암부군龜巖府君께서는 기씨奇氏 집에서 배우셨으니 3세의 유적이 모두 이곳에 있다.- 【僉正府君娶于李氏, 醉隱府君、龜巖府君學于奇氏, 三世遺跡, 並在此。】



600년을 세거한 행주기씨는 쫓겨나고 느닷없는 홍길동 생가로 둔갑한 아치실



[해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 시는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頤齋遺藁》에는 실리지 않았고 일기인 《이재난고頤齋亂藁》에 수록되어 있다. 경진년(1760, 영조36) 2월 5일 장성 아치실을 방문하였을 때 지은 것이다.


아치실은 장성군長城郡 황룡면黃龍面 아곡리阿谷里로 오늘날 홍길동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황당무계한 짓을 벌여 놓은 곳이다.-전혀 사실무근이라는 말이다- 사실 아치실의 홍길동 이야기를 꾸며내어 홍만종洪萬宗(1643~1725)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증보하여 《증보해동이적增補海東異蹟》을 편찬한 순양자純陽子가 바로 황윤석이다. 


그는 일생에 두 차례 아치실을 방문하였는데 선대부터 이 마을과 인연이 깊기 때문이었다. 아치실에 세거하던 인제 이씨麟蹄李氏, 태인 박씨泰仁朴氏와 혼인관계가 있었고, 그의 증조부 취은醉隱 황세기黃世基가 아치실에서 진사 기진탁奇震鐸에게 배웠으며, 그의 종조부 구암龜巖 황재중黃載重은 아치실에서 기진탁의 아들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며 명재明齋 윤증尹拯과 절친하였던 송암松巖 기정익奇挻翼에게 배웠고 기정익의 추천으로 우암 문하와 교유할 수 있었다. 황윤석이 서울의 노론계 인사와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행주기씨는 어디가고 홍길동 분수대만



아치실을 오늘날은 아곡阿谷으로 쓰지만 이는 19세기 이후 공자 고사에 빗대어 바뀐 것이고, 애초에는 그 뜻에 따라서는 소곡小谷이나 제곡弟谷으로 표기하고, 그 음을 따라서는 아곡鵝谷, 아찬곡阿餐谷 등으로 쓴 것이다. 


아곡莪谷이라는 것은 청백리 박수량朴守良의 호라고 하여 유래가 오랜 것으로 혼동하지만 실은 그 후손들이 18세기 말에서야 임의로 붙인 것이고 그 이전의 기록에는 호가 없었다. 아치는 까치와 같은 말로 고어에서 작다는 뜻이었다. 작은 아들을 뜻하는 아찬아들의 아찬이나 섣달그믐을 이르는 까치설날의 까치가 모두 아치와 같은 작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아치실 마을에는 하남河南, 북문北門, 탁곡卓谷 등의 마을로 구분이 되는데, 하남은 송암 기정익의 손자인 기태온奇泰溫과 기태검奇泰儉이 중국의 정이程頤 정호程顥 형제처럼 되고자 하는 뜻을 담아 기씨 종가집을 망정와望程窩라고 하고 서재를 정이 정호 형제가 살았던 하남의 뜻을 담아 하남정사河南精舍라고 하면서 지어진 것이다. 


박수량의 형 박수온의 호 하남도 애초에는 없었는데 19세기에 들어 그 후손-박봉구-이 새로이 만들어 넣은 것이다. 북문은 아치실 마을에 사창社倉이 있었고, 그 북문쪽이어서 붙은 이름이고, 탁곡은 암탉골을 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암탉골 홍길동생가라고 복원한 그 집터는 세종 때 벼슬이 보문관 직제학에 이르렀고 대마도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던 인제 이씨 이견의李堅義의 집터인데 엉뚱한 짓을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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