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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함안 말이산고분과 비슷하게 만든 진주 원당고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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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따시 뚜껑돌 출현한 진주 원당고분군

 

연전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한 적 있거니와, 오늘은 그 후속이다. 

 

진주시 배포자료는 이처럼 시장 행적에 초점을 맞추는 까닭에 자세한 발굴양상을 점검할 유적 현장 사진이 없다.

 
경남 진주시가 매장문화재전문조사기관인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이곳 일반성면 운천리 일원 ‘진주 원당고분군(M2호분) 시굴 및 발굴조사’를 한 모양이라, 그 중간 조사치가 27일 공개되었다.

위선 이 발굴 성과를 살피기에 앞서 저 무덤이 위치하는 데가 일반성면? 면 단위 행정구역 치고는 상당히 이상해 찾아보니 一班城面이라 그 유래를 디지털진주문화대전 기술을 바탕으로 살피니

고려 현종 9년(1018)에 진주목 반성현班城縣이라 했다가 고종 1년(1864)에 반성면이 되고, 이어 반성면이 일반성면과 이반성면으로 쪼개지면서 지금의 명칭이 등장했다 한다.

1반, 2반 분반과는 상관없고 종래 이 지역 명칭인 반성 이라는 곳이 좀 크다 해서 두 개 구역으로 분리하면서 반성이라는 이름은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가면서 1, 2로 짜개졌음을 알겠다. 

경상남도와 진주시가 추진하는 가야문화재 조사연구 지원사업 일환으로 실시한 이번 발굴조사 결과 M2호분이라 명명한 이 삼국시대 무덤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 추가 조사한 결과 토제土堤, 곧 흙으로 쌓은 둑 축조 방식으로 봉분 mound 를 만들었음을 확인했다고 진주시와 조사단은 전했다. 

이와 같은 축조 방식은 아라가야 왕릉인 함안 말이산고분군 봉토분의 그것과 유사한 축조기술이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봉분 트렌치 조사를 통해 봉토封土 바닥에 두텁게 다짐층을 만들고 말목을 박는 방식으로 단단히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는 것이다. 

무덤 내부는 이른바 중앙 연도식羨道式 횡혈식 석실橫穴式石室이라 해서, 무덤방은 돌로 만들되, 그로 통하는 길을 무덤방 정중앙에 마련한 구조로 드러났다.

 



나아가 두 차례 이상 시신을 시기를 달리하며 묻은 흔적이 드러났다고 한다.

대문을 만들어 열고 닫고 하는 구조인 이런 무덤은 본래 등장 이유가 여러 번 시신을 묻기 위함이므로 저와 같은 소위 추가장이라는 매장 행위는 매우 빈번하게 관찰된다. 

그렇다면 언제쯤 이 무덤은 만들었을까? 

조사단은 출토 유물 중 질그릇이 보통 6세기 중바 무렵 가야 말기 형식이라, 복합적인 양상(소가야+대가야+재지계)을 보이는 점을 주목한다.

간단히 말해 이 무덤은 대략 서기 550년 무렵에 만든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금속유물로는 대가야 영향이 짙은 축소 모형 철기와 사비도읍기 백제 영향이라 간주하는 대장식구帶裝飾具[간단히 허리띠 장식을 말하는데 이런 용어를 쓰야지 나는 몹시도 비판적이다]를 비롯해 쇠로 만든 널 고리, 널을 고정할 때 박은 쇠못이 발견됐다.

 



조사단은 이를 통해 진주 원당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이 대가야, 백제 등과 정치 교섭을 한 중요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첨언하지만 꼭 정치겠는가? 문화사 의미가 더 크다고 나는 본다.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개석蓋石[무덤방 지붕 덮개돌]까지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진주 원당고분군 M2호분은 가야 최대급 횡혈식 석실로, 가야 말기의 진주지역 정세를 파악하는 중요 자료”라면서 “추가적인 조사를 실시해 고분의 축조방법과 추가장 형태를 비롯한 상장의례를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무덤은 작년 조사에서 가야  무덤 중 무덤방 덮개돌로는 가장 큰 길이 290cm, 너비 208cm, 두께 30cm)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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