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울릉도8

울릉도는 공도空島가 아니라 왕화王化 밖이었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 시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 제3권 /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에 수록된 울릉도설蔚陵島說이라는 논설이다.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육지와의 거리가 몇 백 리가 되는지 모른다. 매년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흐릿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바다가 청명할 때, 영동嶺東으로부터 바라보면 마치 한 조각 푸른 이내가 수평선 저편에 가로놓여 있는 것과 같다. 유독 진주부眞珠府가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 중 소공대召公臺에 오른 이들은 더러 이 섬의 숲과 묏부리의 형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으니, 이로써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루나 사슴, 갈대, 대나무 따위가 왕왕 바닷가 백사장에 떠밀려 오고, 이름 .. 2024. 1. 31.
고려 시대 내내 한반도 밖에 위치한 울릉도 정광태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은 울릉도와 독도가 이사부 정벌 이래, 그러니 신라 지증마립간 이래 두 섬이 죽 한국 땅이라 했지만 웃기는 소리라 놀랍게도 울릉도는 고려시대 내내 고려 땅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리만치 철저히 한반도 밖에 위치한 별도 문명 문화권이었다. 고려사 권58卷 志 권 제12 지리地理3 동계東界 울진현蔚珍縣을 이르기를 본래 고구려 우진야현于珍也縣【고울이군古亐伊郡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삼았다. 고려 때에 현(縣)으로 강등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置令]. 고 하고는 그에다가 울릉도鬱陵島를 첨부하기를 현縣 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于山國이라 불렀고, 무릉武陵 혹은 우릉羽陵이라고도 불렀으며 사방이 백리이다. 지증왕 12년(5.. 2024. 1. 25.
여진 소굴로서의 울릉도 여진이 약탈경제 기반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그래서 유목민 비스무리한 족속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인지, 그네를 둘러싼 가장 큰 착란이 그들이 바다에 약할 것이라는 실로 막연한 생각이 점철하지만, 그들은 해전海戰의 명수였으며 이들보다 바다를 잘 이용한 민족은 동북아시아에서 찾기 힘들다. 그런 면모는 고려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마는, 주로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삼국시대 역시 그에 못지 아니해서 동해안을 치는 말갈은 예외없이 바다를 통한 침략이었다. 신라가 북방으로 치고 올라가고 그곳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이 여진 혹은 말갈은 골치였으니, 동해를 주름잡은 그들의 해군력을 약화하고자 단행한 일이 바로 이사부에 의한 우산국 정벌이었다. 신라가 왜 우산국을 쳤는지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당시 추세를 .. 2024. 1. 24.
삼척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울릉도, 우산국은 생각보다 더 가깝다 하도 동해안, 그리고 울릉도 얘기를 쏟아내니 경주에서 맹동에 옴짝달짝 못하고 방구석 신세인 오세윤 형이 틱 하니 카톡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르기를 "울릉도에서 대관령 잘 보인다." 하는 게 아닌가? 잉? 대관령이 잘 보인다고?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내가 하는 고민 일거에 해결하는데? 하고선 다시 다그치니 신경질을 내면서 이르기를 "내가 봤다니깐?"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대관령? 강릉 주재 남대천 철새 특파원 우리 공장 유형재 형한테 기별을 넣어 "승님, 블라블라 울릉도 사진 있소?" 했더니만 본인은 찍은 적이 없고 삼척에서는 울릉도가 가끔 육안으로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혹시나 해서 우리 공장 DB를 돌려봤다. "삼척+울릉도"라는 키워드를 넣으니 잉? 이게 뭐란 말인가? 앞에 부친 사진, .. 2022. 12. 24.
고려시대 여진으로 푸는 신라 우산국 정벌 내가 연구사 검토할 때까지만 해도 이 대목이 집중 부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나, 나는 언제나 말했듯이 그 비밀은 고려시대 여진족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진이 한반도를 침략하는 통로는 언제나 동해안 해로였다. 고려시대 동해안 피침탈 기사를 보면 언제나 여진은 배를 타고 나타났다가 배를 타고 사라진다. 그래서 그 지역 지방관 업적을 나열하는 데는 언제나 적선 몇 척을 나포했다는 기록이 빠지지 않는다. 그들의 침투 지역에 주된 지역은 경주였다. 이들이 자주 찾은 곳은 경주였다. 그들이 경주를 침략하는 통로가 바로 해로다. 이는 역설적으로 신라시대 신라가 동해안을 진출한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그것 역시 말할 것도 없이 해로였다. 육로를 통하는 어려움은 김순정의 수로부인 관련 기사에서 명.. 2022. 12. 24.
지증왕은 왜 우산국을 정벌했는가는 지도 한 장으로 충분하다 우산국, 곧 지금의 울릉도가 왜 그리 신라한테 중요했는지, 이 지도 한 장으로 충분하다. 신라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간 과정은 그 통로 특성으로 볼 적에 육로와 해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특히 해로를 통한 동해안 확장은 아주 집요해서 신라는 생득적으로 왜 동해를 장악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니, 이미 파사왕 무렵인가 강릉 일대를 먹어버렸으며, 자비 소지왕 무렵에는 다시 그 북쪽 함흥평야 일대까지 수중에 넣었다. 지금의 마운령 황초령 턱밑까지 신라가 새로이 개척한 영토를 순수해? 뭐 그렇다니깐 이 땅을 진흥왕이 개척한 줄로 착각하는 놈 천지다. 그 순수비는 신라가 새로 개척한 땅이라 했지, 진흥왕이 개척한 땅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삼국사기 봐라! 신라가 진흥왕 때 저 땅을 개척해? 자비왕 소지왕 무렵에는.. 2022. 12. 23.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