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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보고서 발간 2년 강제화, 그 의미 과거 문화재보호법, 그리고 현재 그에서 분리한 매장법, 더 정확히는 그 시행세칙인지로 기억한다만, 발굴은 완료한지 2년안에 보고서를 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 있다. 과거에도 있었지만 이는 사문화하다시피 했지만, 이를 정말로 법적으로 강제화하기 시작한지는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를 처음 도입할 적에는 반대 일색이었다. 그 내막을 이해하지 않는 바 아니지만, 보고서를 제때 내지 않는 발굴 기관과 발굴자는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믿음, 나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2년이라는 기간도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한 차례 연장을 하는 걸로 기억한다. 언젠가 고백한 적이 있지만, 발굴완료 후 2년 안에 보고서 강제화에 나 역시 생각보다 더 깊이 관여했다. 내 신념이 옳다는 믿음 지금도 변함이 없다. 왜 2년안에 .. 2024. 1. 21.
도굴을 부른 후장厚葬(1) 박장薄葬과는 상대적이다 인류문화사를 보면 박장薄葬과 후장厚葬을 둘러싼 오랜 논쟁이 있었다. 같은 유가 윤리로 무장한 사회라 해도 이를 둘러싼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 달라지기도 했으니, 조선시대는 대표적인 박장 지향 사회였다. 내가 볼 땐 뭐 묻을 것도 없어서 그랬겠다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면 또 달랐으니, 묵자시대에 그가 이끄는 교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중국 전국시대를 보면, 묵자 교단은 박장을 내세우면서 후장을 선호하는 유가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음을 본다. 그렇다면 박장이란 무엇이고 후장이란 무엇인가? 죽은 사람을 땅에다 묻을 적에 각종 껴묻거리를 덕지덕지 넣어 쑤셔박는 시스템을 두터울 후厚에다가 장사지낼 장葬자를 써서 후장이라 하며, 그에 견주어 최소한의 그릇 몇 개 정도만 넣.. 2024. 1. 21.
와당과 이형토기異形土器 사이, 배기동 굴욕사건 70년대 중반, 아마도 76년 무렵으로 기억하거니와 당시 서울대박물관에서 석촌동 발굴조사를 했다. 3호분인가 4호분을 배기동 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님이 팠다. 그 무덤앞 아마도 조선시대로 치면 정자각 같은 제사 부속 건물이 있었다. 거기에서 한성백제시대 와당 1점이 튀어나왔다. 크기는 손바닥만하고, 거기에는 생판 보도 듣도 못한 문양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성백제에 기와? 개소리였다. 더구나 와당? 역시 개소리였다. 배기동 선생이 당시 보고서에다가 이 와당을 소개하기를 이형토기異形土器 라 큼지막하게 썼다. 나는 선생님 만나면 지금도 이걸 갖고 놀린다. "와당도 모르는 양반이 무슨 선생질하세요?" 그때마다 선생은 시대의 한계를 논하지만 어쩌리오. 이것이 숙명인 것을... 그래서인가? 한때 백제고고학.. 2024. 1. 21.
[오늘의 한마디]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사는 이유 평균수명을 성별로 보면 아마 여자가 남자보다 7세 정도 높을 것이다. 이건 비단 사람만 아니라 다른 동물계 전반에도 반복하는 현상으로 아는데 며칠 전이다. 벌써 그 말을 해 준 분 성함을 잊어버리는 단계에 와 버렸는데 암튼 그 분이 왈 "여자는 마누라가 없자나" 그 분도 아마 누군가에서 들었거나 누군가 글에서 읽었을 것으로 보는데 명언이라 생각해서 적어둔다. *** 이 글을 쓰다 보니 저 말을 유영구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이사장께서 해 주신 듯하다. 2024. 1. 21.
세상의 모든 마누라들 세상의 모든 마누라들..언제 내가 내 옷 사는 거 봤어? 다 당신 꺼나 애들 꺼지? 나..(속으로만) 근데 지금 걸친 옷은 누가 산거야? 세상의 모든 마누라들..쇼핑하는 거 나도 피곤해 그만 우거지상 써 나..(속으로만) 눈에 불들어온 거 보여. 나도 답사는 피곤해. 세상의 모든 마누라들..지금 내가 십원짜리 아끼는 거 안 보여? 나..(속으로만) 그 화장품 얼마짜리야? 근데 왜 내가 해외 출장 때 간만에 화장품 사가면 이딴 거 왜 사와냤고 던져버려? (2016. 1. 21) *** 세상의 모든 남편은 자기 마누라가 다 수수하다고 말한다. 실제 그렇다고 믿는다. 쇼핑은 남편 출근한 다음 집에서 인터넷으로 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수수한 마누라는 우리 엄마 세대에나 가능하다. 왜? 당신들은 쓸 돈이 없었으니.. 2024. 1. 21.
당위가 빚어낸 화랑세기 가짜론 "지금까지 제기된 화랑세기 위서론僞書論은 그것이 위서僞書여야 한다는 당위론이 빚어낸 욕망이라고 필자는 본다. 지금까지 화랑세기가 위서임을 주장하는 글과 근거는 부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 과연 그것이 위서임을 입증했는가? 僞書論,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좌절됐다. 그런 모든 노력은 수포水泡로 돌아갔다. 그것이 위서임을 주장한 어떤 논자는 “만약 이 책이 진본이라면, 그것은 사료 부족에 허덕이는 고대사 연구에 백년대한百年大旱에 단비와 같은 것이며, 필사본 화랑세기의 출현은 그야말로 ‘世紀의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 그의 말마따나 화랑세기는 百年大旱의 단비이며 그것의 출현이야말로 세기의 발견이다." (金台植, 〈‘世紀의 발견’, 『화랑세기花郞世紀』〉 《.. 2024. 1. 21.
도교 공부를 위한 참고 문헌 실로 방대하나, 도교 기초 확립을 위한 참고문헌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아래가 있다. 아래 소개하는 것들은 내가 도교 공부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은 것들이다. 시중에서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도교 개론서로 아래가 있다. 갈조광葛兆光, 심규호 옮김 《도교와 중국문화》, 동문선, 1993. 구보 노리타다 저, 최준식 옮김 《도교사》, 분도사, 2000. 酒井忠夫 外 지음, 최준식 옮김: 《道敎란 무엇인가》, 민족사, 1990. 詹石窓 著, 김영수·안동준 공역: 《도교와 여성》, 창해, 2005. 마노 다카야 저, 이만옥 역 《도교의 신들》, 들녘, 2001 장스촹 저, 안동준·언샤오리 역, 《도교문화 15강》, 알마, 2012년 앙리 마스페로, 신하령·김태완 옮김 《도교》(원서명 Le Taoisme et.. 2024. 1. 21.
나주 복암리고분 전시관이 기다린다고, 누구를? 나주복암리고분전시관 전시실엔 실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전시관 내부에는 많은 토기들과 옹관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토기는 복암리 고분군에서 나온 토기뿐만 아니라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다양한 토기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다양한 독무덤이 개방형 수장고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장고는 유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앞에 있는 독무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유물들을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월 휴관 일정 공지 ✔ 1월 15일(월) 휴관 ✔ 1월 22일(월) 휴관 ✔ 1월 29일(월) 휴관 휴관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관람객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이 전시관 현황과 그 개장이 지닌 의미는 아래를 참고하라. [국내 박물관 현황과 연혁] 공립박물관 민간위탁 경영 포문을 연 나주복암.. 2024. 1. 21.
과거가 끝나기 무섭게 출현하는 소동파 강고한 주자학 지배질서를 관통하려는 조선사회에서 그 편협성을 깨뜨린 이는 야동 야설이었다. 그 경험이 어떻게 축적해 어떻게 발현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내가 본 것으로는 전자, 곧, 조선사대부가 야동을 경험한 사례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공맹? 효경? 소학? 얼마나 고리타분한지 그걸 읽는 놈들은 다 안다. 제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두 끼면 질리기 마련이다. 저들을 옆에 끼고 산 것처럼 포장했지만, 다 개소리였다. 퇴계가 마흔살에 성리대전을 접하고서 식음을 전폐했다고? 그건 선생 노릇하기 위함이었다. 그보다는 과거가 끝나면 고려에 무수한 소동파가 탄생한다는 이규보의 증언이 더 생생한 이유다. (2023. 1. 21) 2024. 1. 21.
[당시] 問劉十九: 白居易 綠蟻新醅酒 紅泥小火爐 晩來天欲雪 能飮一杯無 인상파가 따로 없다. 당시가 동아시아 문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딱 20자로 추운 겨울날 눈이 내리려는 저녁 술이나 한 잔 할까 싶은 심정을 카메라처럼 찍어냈다. 2024. 1. 20.
선과 관련이 있는 조선 막사발의 미 조선 막사발의 미는 불교 선과 관련이 있다. 유교와는 관련이 없다. 불교의 선에서 일본의 다도가 나왔는데 조선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가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일본 다도의 흐름에서 막사발이 가지고 있는 위치 때문이다. 조선의 미가 아니다. 이 말에 분개한다면. 찾으면 된다. 이쪽에서도. 조선 막사발의 미가 한국 역사의 흐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그런 것을 찾을 수 있다면 필자도 물론 기쁘겠지만. 그런 확률은 별로 높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해 보자. 코카콜라 병이 있다. 코카콜라 병을 하늘에서 조종사가 먹다가 버려 그것이 부시맨의 손에 들어가 이것이 하늘이 준 엄청난 선물로 간주되어 숭상되더라도 그 코카콜라 병은 조종사 나라의 역사책에 기술될 수는 없다. 코카콜라 병은 부시맨들의 역사에서 의미가 있을 것.. 2024. 1. 20.
쿄토의 현재모습에서 과거를 보기 (1) 지금 쿄토의 현재 모습은 800년대 헤이안쿄의 모습이 아니다. 헤이안시대 왕성 구역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오다 시대 이후 다시 일어나 자연적인 도시의 팽창을 경험한 결과가 지금 쿄토이다. 간단히 설명해 보면, 위 지도의 화면 중간 약간 우측에 강이 하나 보일 텐데 이 강의 동쪽은 원래 헤이안쿄가 아니다. 헤이안쿄는 이 강의 서쪽에만 있었다. 강의 동쪽은 헤이안시대 후반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쿄토의 중심지역 중 일부가 되었다. 일본의 국보로 유명한 "낙중낙외도"라는 그림이 있는데, 여기서 "낙외"가 바로 저 강의 동편이다. "낙"이란건 "낙양"의 뜻이다. 헤이안시대 왕성의 경내에 있었던 지역이 "낙중"이다. 따라서 "낙중낙외도"의 "낙외"지역은 원래 헤이안경이 아니었던 곳이다. 2024. 1. 20.
형식이 내용을 구속한다, 부장품의 경우 이른바 닌토쿠천황仁徳天皇이 묻힌 곳이라 하는 오사카 다이센능고분大仙陵古墳이다. 간단히 다이센고분大仙古墳이라고도 한다. 이 무덤을 일컬어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전 세계를 통털어 옛날 무덤 왕릉 중에서는 최대 규모라 선전하곤 하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2018년 4월에 궁내청宮内庁 3차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봉분과 해자 합치고 바깥 경계 구역까지 포함한 최대 길이 840m에, 너비 최대 654m 봉분만은 길이 486~525.1m 봉분 아래쪽 기준 면적 103,410~121,380㎡ 뒤쪽 원형 봉분만 지름 249~286.33m, 높이 35.8~39.8m 앞쪽 네모난 모양 전방부前方部가 너비 307~347m에 길이 237~257m, 높이 33.9~37.9m 에 달한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남을 보겠다. 흔히 황남.. 2024. 1. 20.
쿄토의 마지막 장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이제 쿄토의 마지막 장면으로 히데요시 시대.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후반 모습이 되겠다. 이 시대가 되면 헤이안쿄平安京 시대 조방條坊의 모습은 남아 있고 전국시대 말이 되면 시가지 규모도 상당히 회복했지만 성 외곽 모습은 이미 헤이안쿄와 같은 정방형은 아니다. 히데요시는 쿄토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성 둘레에 해자를 파고 그 흙으로 토담을 쌓았는데 이를 오도이御土居라 한다. 그런데 오도이로 둘러싸인 쿄토 모습이 뭔가와 닮지 않았나? 결국 도시가 위치한 자연적 지리적 공간을 찾아 안착하면 이런 모습이 되지 별 뾰족한 수 없다 이거다. 이것을 자연과의 융합을 꾀한 뭐 어쩌고 하는 식으로 미화할 수도 있겠고, 또 조방제를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이도 저도 아닌 전제왕권 이데올로기의.. 2024. 1. 20.
전국시대의 시작과 쿄토: 오닌의 난[応仁の乱] 전후 (1467) 쿄토 이야기를 시작하는 김에 좀 더 써 본다. 오닌의 난 (1467)은 우리나라 조선 세조 때 해당하는 사건으로 일본에서 무로마치 막부가 사실상 붕괴하고 전국시대가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때가 되면 쿄토가 어떻게 바뀌는가. 이렇게 바뀐다. 지금도 쿄토에 가면 상경上京과 하경下京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원래 헤이안쿄平安京 시대에는 상경과 하경이라는 지명은 없었다. 이 지명이 나오게 되는 것은 대략 오닌의 난 전후한 시기부터로, 무사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니 쿄토가 초토화해서 시가지가 전부 사라지고 성채에 둘러싸인 두 개 시가지만 남게 된다. 이 중 북쪽의 상경과 남쪽의 하경인데 북쪽 상경이 바로 덴노가 살던 쿄토고쇼[京都御所]가 포함된 지역으로 지금도 쿄토 가면 볼 수 있는 니조성二条城이 있는, 쇼군 저.. 2024. 1. 20.
일본의 천도: 새로운 땅 찾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 중에 고대 일본의 천도에 대한 기록은 헤이케 모노가타리平家物語[평가물어]에 좀 나와 있다. 요약하면,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평천성, 1118~1181)가 치세 중에 도읍을 헤이안쿄平安京[평안경]에서 지금의 고베시 인근인 후쿠하라로 옮기려 한다. 여기는 딱 6개월 정도 버티다가 못버티고 다시 헤이안쿄 (쿄토)로 돌아간 것으로 나오는데 후쿠하라로 천도하기 전의 정황을 보면 관리를 보내서 먼저 측량을 하게 한다. 주작대로와 조방을 정하는데, 덴노가 머물 공간에 이미 귀족의 저택이 있는 경우 이를 덴노가 받는 대신 귀족에게는 벼슬을 내리는 장면이 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장소가 좁아 결국 후쿠하라 천도는 실패한다. 조방제가 완비된 도성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지.. 2024. 1. 20.
책을 탈고하며 서문을 쓰다 책 한 권을 탈고했다. 영문으로 쓴 편집본이고 출판사와 계약은 아직 안 한 상태다. 아마존을 통해 영미권으로 출시할 생각이다. 아무도 안 볼 수도 있겠지만, 지난번 미라 책도 생각지도 않게 전 세계적으로 E book이 삼만 부 가까이 읽힌 모양. 이번에도 출간해 봐야 알 것 같다. 얼마나 팔릴지는. 탈고하고 서문을 쓰는데, 김부식의 진삼국사표는 정말 명문이라는 생각을 새삼 한다. 臣某言。古之列國。亦各置史官以記事。故孟子曰。晉之乘,楚之擣扤,魯之春秋。一也。惟此海東三國。歷年長久。宜其事實。著在方策。乃命老臣。俾之編集。自顧缺爾。不知所爲。中謝。 伏惟聖上陛下。性唐堯之文思。體夏禹之勤儉。宵旰餘閒。博覽前古。以謂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而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歎也。况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 2024. 1. 20.
[러시아] 아나스타샤는 그곳에 있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 피터와 폴 대성당 Peter and Paul Cathedral 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차르) 니콜라이 2세의 막내딸이자 러시아 내전(적백내전) 당시 온 황실 일가가 처형되었다고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제기되어 온 생존설로 인해 유명해진 아나스타샤(아나스타시아)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Анастасия Николаевна Романова.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무덤이 있는 곳,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안의 '피터와 폴 대성당'. 이곳엔, 정말 그녀가 잠들어 있을까? https://maps.app.goo.gl/CoeAS36PG6ZbKsvz8 상트페테르부르크 ·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www.google.com https://maps.app.goo.gl/ShE3tTva4ZE4STog6 피터와 폴 대성당 · Peter and P.. 2024. 1. 20.
[근간예고] 상나라 정복翦商: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근간 예고] 다음주 화요일에 인쇄 들어가는 중요한 책이 있다. 이란 책이다. 중국 고대 하상주 시대 1000년, 특히 상-주 교체기를 집중해서 다룬 고고학 책인데 936쪽 벽돌 규모이고, 내용도 그만큼 알차다. 중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문학 출판사인 광서사대 출판사에서 나와 1년 동안 40만부가 팔린 대형 베스트셀러이며, 지난해 30대 호서에도 선정된 문제작이자 화제작이다. 우선 이 책은 방대한 분량임에도 놀라운 흡입력과 새롭게 알게 되는 역사적 사실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아마 최근 십수 년 사이에 나온 고고학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임팩트 있는 정설定說 폭격기라 할 만하다. 추천 서문을 쓴 원로 고고학자 쉬훙 교수는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 책을.. 2024. 1. 20.
충주 누암리고분 忠州樓岩里古墳 충주 누암리 가-50호분 단면 모형으로 최근 개소한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마당에 재현했다. 누암리고분군과 이 고분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충주 누암리고분군 忠州樓岩里古墳群 충청북도 충부시 중앙탑면 누암리 산1번지 일대 사적 제463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충주지역에 설치한 국원소경(國原小京)의 운영과 관련된 신라시대 대규모 집단무덤이다. 충주시내에서 북서쪽으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누암리 일대에 270여 기 고분이 7개 구릉지에 나뉘어 분포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는 현재 정비복원된 가 구역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주류를 이루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을 비롯하여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橫口式石室墳], 돌방무덤[石槨墓]이 확인되었다. 그중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 2008년에 조사한 가-.. 2024. 1. 20.
헤이안쿄: 서기 800년 경 - 서기 1000년 경 서기 800년 경, 헤이안쿄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의 모습이다. 바둑판모양으로 구획된 조방제 모습이 확인된다. 이 헤이안쿄가 헤이안 말이 되면 어찌 되느냐. 1000-1200년 경의 헤이안쿄다. 이때가 되면 도성 서쪽 절반이 날라간다. 이 지역은 배수가 잘 안 되어 사람이 살기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왕성도 이 시기에는 원래 있었던 주작대로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쿄토고쇼 지역으로 옮겨간다. 처음 건립되었을 때는 건물이 없던 가모가와 동쪽에 거주지와 절들이 들어선다. 실제로 무가정권 세력자들은 원래는 헤이안쿄 영내가 아닌 가모가와 동쪽에 살았다. 조방제 도시구획?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몇백년만 지나면 다 사라진다. 쿄토는 지금까지도 서기 800년 당시의 조방제가 완연한 쿄토의 모습은 회복하..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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