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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법제의 기원과 전개》(임병덕)를 마침내 손에 쥐고서 임병덕 근간 《중국 고대 법제의 기원과 전개》 임병덕 근간 《중국 고대 법제의 기원과 전개》9월 출간 예정인 『중국 고대 법제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책 소개 글수호지 진묘 죽간睡虎地秦墓竹簡이 공개된 70년대 후반 이후는 진한사秦漢史 연구는 출토문헌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수historylibrary.net 최근 충북대 사학과를 정년퇴직하고선 그 명예교수로 추대된 중국 고대사학도 임병덕 선생이 《중국 고대 법제의 기원과 전개》(혜안, 2025)이라는 책을 조만간 낸다는 소식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생 본인의 입을 빌어 앞과 같이 전했거니와 그 책이 마침내 나왔다. 그렇게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는 선생과 이런저런 인연을 기간으로만 따지면 적어도 20년 이상을 헤아린다. 그에 발판이 되어 그의 저역서 출판.. 2025. 9. 7.
[고고통신] 양으로 나갈까 질로 승부할까 난 보다시피 지금은 세계 고고학 시장 동향을 보급하는 일을 알량한 사명처럼 삼아 한다. 이름하여 고고통신이라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이거 한다 돈 나오는 것도 없다.그냥 하고 싶어서, 그리고 이런 일은 나 말곤 국내서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 사명 핑계 삼아, 그리고 킬링타임 삼아 한다.이 짓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겠지만 그래 하다 보니 그런 대로 쏠쏠한 재미도 주고 또 그런 대로 이 소식을 눈여겨 보는 이가 없지는 않은 듯 해서 보람이라 할 만한 쥐꼬리가 없지는 않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에 올인하다시피 하는데 고민이 없지 않으니 바로 저 문제다.질을 택할 것인가 양으로 갈 것인가다.그 둘 다 생각보다 엄청난 체력 고갈과 시간 투자가 필요하다.둘을 겸비하면 되지 않는가 하겠지만 한심한 소리다.에.. 2025. 9. 7.
춘추시대 작은 제후국 예芮의 군주 부인 무덤 발굴 최근 중국 섬서성 고고연구원이 섬서성 징성澄城 유가와刘家洼 소재 예국芮国 유적 동Ⅰ구[东Ⅰ区] M3 무덤에 대한 조사 성과를 발표했다. (중국고고학에서 쓰는 약어 M은 mound, 곧 무덤이라 이걸로 표시된 곳은 예외없이 무덤이라 보면 된다.] 유가와刘家洼 예국芮国 유적은 징성현澄城县 왕장진王庄镇이라는 데 소재하며, 개중 M3는 두 개 '中'자형 국군묘国君墓(M1, M2) 사이에 위치한다. 이 무덤은 묘도墓道가 없는 무덤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9개 벽감壁龛을 갖췄으며 그에는 각각 15세에서 30세 사이 여성 인골이 발견됐다. [이른바 순장을 했다는 뜻이다.] 장례 도구[葬具]는 일곽쌍관一椁双棺이라, 덧널 하나 안에 관 두 개를 안치했다.도난당했으나 177점(세트)에 이르는 기물이 출토되었다. 개.. 2025. 9. 7.
호주 인류 정착은 5만 년을 넘지 못해 호주 원주민 문화는 오랫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현존 문화로 여겨지며, 과학 문헌에서는 이들이 호주 대륙에 도착한 시기를 6만 5천 년 전으로 추정한다.그러나 현대인에서 네안데르탈인 DNA 흔적을 분석한 새로운 유전학 연구는 이러한 기존 연대 측정에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도착 시기가 5만 년을 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유타 대학교 인류학과 명예교수인 제임스 오코넬James O'Connell이 호주 라 트로브 대학교La Trobe University 고고학자 짐 앨런Jim Allen과 공동으로 수행한 이 연구는 학술지 오세아니아 고고학Archaeology in Oceania에 게재되었다.이들의 연구 결과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현재로부터 43,500년에서 51,500년 전 수천 년에 걸.. 2025. 9. 7.
균역법 줄어든 세수의 충당 앞에서도 썼지만, 균역법은 일반 평민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그 손실분을 충당한다, 이것이 요지다. 교과서적인 설명을 보자면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는데앞에서도 썼지만 선무군관 운운은남아 있는 호적을 바탕으로 정밀한 검토를 바란다. 균역법 이후에 선무군관이 되어 새로 군포 1필을 납부하게 된 이 숫자가 많지 않다. 이 숫자로는 전혀 세수 부족분을 메울 수 없다. 게다가 몇 년만 지나 다시 만든 호적을 보면그나마 있던 이들도 전부 다시 유학이나 업무 등 양반 직역으로 복귀하여선무군관이라는건 불과 몇 년만에 껍데기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균역법이라는게 정말 취지대로 평민의 군포 2필을 1필로 줄였다면그 세수 부족분은 막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무군관이 무력화했다면도대체 어디서 .. 2025. 9. 7.
순조 연간의 호적과 인구 감소 1807년(순조 7년)의 경우 에 나온 당시 인구는 7.561.463명이었는데 그보다 18년 후인 1835년(헌종 원년)에는 6.615.407명으로 거의 100만명 정도가 줄었다. 18년 동안 일어난 거의 100만에 가까운 인구감소는 주로 역병과 기근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인구감소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위와 같은 이야기가 있는 바, 물론 순조 연간이 전통적 감염병에 콜레라까지 성하여 매우 사람이 많이 죽었던 시기임은 분명한데, 저 인구 감소는 단순히 사람이 죽어서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저 시기의 호적을 보면 부실 그 자체다. 원래 있었던 가구가 사라지고, 아예 마을 전체의 호구가 1/3도 기록이 안 된 동네도 나온다. 이것이 물론 감염병 때문에 죽어서 사라졌을 수.. 2025. 9. 7.
백년 정도 빨라 보이는 지주전호제 16세기 말엽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병작제는 배타적 소유권의 확립을 배경으로 하였다. 병작의 운영 원리는 계약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요소로서 작개제와 달리 경제 외적 강제주7에 의해 유지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토지 매매가 활성화되고 지주가 소유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며 강제력 없이 지대를 수취하는 병작제가 위치를 공고히 해나갔다. 15세기까지 주변부에 머물렀던 병작제는 16세기 후반부터 확대되었고, 17세기 중엽을 거치며 급속히 진행되었다.위는 지주전호제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다. 필자가 호적을 들여다 본 소견으로는우리나라 지주전호제의 확대, 급속한 진전은18세기 중엽 이전은 어렵다고 본다. 왜냐. 18세기 전기만 해도 동네마다 노비 사역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지주전호제가 중심적으로 떠오를 상황이.. 2025. 9. 7.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서얼금고 우리나라의 서얼금고庶孼禁錮는 유별난 데가 있다.이 서얼금고의 이유를 유교 때문,혹은 태종의 명령 때문이라고 하지만,사실 서얼을 몇 대가 지나도 대물림으로 몽땅 금고해버리는 짓은어느 유교 경전에도 없는 일이고,같은 유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드문 일이며더우기 태종은 그 스스로 서얼 금고를 명했다기보다,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금고의 전통을 재확인한 데 불과하다.오히려 이전보다 태종의 금고는 그 정도가 완화된 측면이 있다는 점요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쯤 되면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렇게 서얼 금고가 집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이 되었는지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유교나 태종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건 일종의 책임회피이고서얼금고가 된 이유는 어떤 사회적 이유에서 계속 유지.. 2025. 9. 7.
절반도 파악 안 된 1801년 조선 인구 700만 순조실록3권, 순조 1년 12월 30일 임신 4번째기사 1801년 청 가경(嘉慶) 6년한성부에서 오부와 팔도의 원호와 인구를 아뢰다한성부(漢城府)에서 민수(民數)를 올렸는데, 오부(五部)와 팔도(八道)의 원호(元戶)가 모두 1백 75만 7천 9백 73호이었고, 인구는 남녀가 모두 7백 51만 3천 7백 92명이었다. 실록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1801년 경 호적을 보면, 실제 인구의 절반도 호적에 안올라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7백 만 명? 그렇다면 이때 이미 인구가 필자가 보기엔 1500만 명 넘었다. *** [편집자주] ***누누이 말했다.전근대 인구통계는 믿을 수 없다고.인두세 피하려 틈만 나면 누락했다.세금이다.조선총독부가 비로소 근대적 인구센서스를 하는데 이 친구들이 할 때마다 놀랬.. 2025. 9. 6.
우리 대부분은 유학모칭자의 후예이다 조선후기사에서 유학모칭자의 풀은 아주 다양한데 19세기가 되면 이 다양한 백그라운드의 사람들이 유학모칭자의 거대한 저수지에 다 모여들었다. 원래 지배계급인 양반들이 볼 때 유학모칭자, 한산자閑散者, 놀고 먹는 이들이라 불리는 자들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7세기만 해도 양반의 하위그룹, 서얼층이 대부분이었다. 서얼은 홍길동처럼 내가 서얼이면 끝이 아니고, 그 위로 몇 대 조인지 모를 조상이 서얼이면 그 아래 후손들이 통채로 금고가 되는지라 향촌에서 이들이 한산자 그룹을 형성했고 정부에서 유학모칭자라고 부르면 대개 이들을 의미했다. 이들은 정부 눈치를 보다가 될 거 같으면 유학을 칭하다가도 호적이 빡세질 것 같으면 업유, 업무를 칭하기도 했는데어느 쪽이건 간에 군역을 면제받는 것은 마찬가지라 자칭타칭 양반.. 2025. 9. 6.
역시나 이번에도 부엌이 토해 낸 부산 두구동 유리 곡옥 거푸집 전북 장수발 발굴성과에 격발해 지인들 도움을 받아 부쩍 유리 거푸집 관련 자료들을 검출 중이어니와,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바는 부산 금정구 두구동 주거 유적 출토품이라, 배재훈 선생이 소개해준 것으로부산 지역을 연고지로 하는 지역 언론 국제신문이 기획 중인 [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중 하나라, 편에 두구동에서 나온 유리제 곡옥 거푸집이라는 제하로 소개가 되었으니, 필자는 김동윤 동삼동패총전시관 학예연구사다. (탑재 일자는 2025-02-26 18:53:38) 도판을 부산박물관 제공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이 박물관에 있는 모양이라내 의심이 다시금 확인되는 것 중 하나가 이 역시 희한하게도 공방이라 할 만한 곳이 아니라 이번에도 역시 일반 주거지 부엌 쪽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거 .. 2025. 9. 6.
동학혁명은 "유학모칭자"들이 주도했다 동학혁명은 필자가 보기엔 19세기에 급증하여 많게는 인구의 절반 가까이까지 차지했을지도 모르는,"유학모칭자"들이 주도했다고 본다. 이들은 기본적인 문자 해독 등 어느 정도의 독서층이고, 사는 것도 다른 이들보다 나은 사람들, 그리고 19세기가 될 때까지 양반들의 집요한 견제를 뚫고 마침내 유학을 모칭하는 데까지 이른 장난 아닌 사람들이라, 19세기 말 정부를 뒤엎겠다고 들고 일어날 사람들은 그 규모나 성정으로 볼 때 이 사람들 아니면 할 만한 사람들이 없다. 이 안에는 당연히 농사를 자기 손으로 짓는 사람도 있었을 터이고, 유학까지 따냈으니 다음 단계로 소과 정도는 급제자도 많이 나왔을 터, 동학혁명이 아래로는 농사꾼에 위로는 진사까지도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아울러 그 성격을 정의.. 2025. 9. 6.
동학농민혁명을 "동학혁명"으로 불러야 네이버가 제공하는 옛날 신문 등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지금의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은1980년을 거치며 1990년대 초반부터 보편화한 명칭이다. 그 이전에는 그냥 "동학혁명"이라 불렀다. 동학혁명이 필자가 보기엔 보다 학술적으로 훨씬 더 중립적인 명칭이다. 여기에 그 정체도 불분명한 "농민"을 굳이 동학혁명의 명칭 안에 집어 넣은 것은1980년대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게 그 당시 불렀다고 해도 그건 사회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치고, 지금은 이 명칭을 유지할 이유가 없다. 완전히 타성적으로 이 명칭을 유지하는데, 정체도 불분명한 "농민"을 이 안에 넣어놓으니까이 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정확히 구명이 안 되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아니겠나. 왜 1980년대를 거치며 동학혁명의 이름에 농민짜가.. 2025. 9. 6.
리마 가스 공사 현장에서 2,000년 전 선사 시대 무덤 발굴 페루 수도 리마의 가스 파이프라인 확장 공사 중 800년에서 2,000년 전으로 추정되는 최소 5구 무덤이 발견되어 리마에서 한때 번성한 고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드러났다고 이곳 언론 EFE가 6일(한국시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유적은 도시 남서쪽에 위치한 고급 주택가 산티아고 데 수르코 지구Santiago de Surco district 지하에서 천연가스 유통업체인 칼리다Cálidda 노동자들이 발견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들이 오늘날 약 1,100만 명이 사는 대도시가 위치한 계곡 지역에 살았던 리마Lima 문화 및 이흐스마Ychsma[발음을 들어보면 이슈마 정도로 들린다]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리마와 칼라오 대도시권 칼리다 고고학 모니터링 계획 Archaeologica.. 2025. 9. 6.
호박 보석 장식한 4,000년 전 폴란드 우네티체 문화 무덤 발굴 폴란드 서西 포메라니아West Pomeranian Voivodeship 주 노베 오브제지에르제Nowe Objezierze에서 호박과 청동 보석이 묻힌 4,000년 된 우네티체Únetice 문화 무덤들이 발굴되었다고 슈체친 대학교University of Szczecin 조사단이 최근 발표했다. 슈체친 대학교 고고학자들이 노베 오브제지에르제에서 4,000년 된 무덤을 추가로 발견했다.이 무덤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과 어린이 무덤이다. 이 학과 아그니에스카 마투셰프스카Agnieszka Matuszewska 박사가 주도한 이번 조사에는 슈체친Szczecin 국립 박물관 전문가, 트리시티Tricity 지역 고고학자, 포메라니아 의과대학Pomeranian Medical University 이보나 텔Iwona Teu.. 2025. 9. 6.
중공군은 쨉이 안 되는 북한군 구스 스텝goose step https://www.youtube.com/watch?v=7ohj6Qbe-Qk https://www.youtube.com/shorts/fUccldGxG8I https://www.youtube.com/watch?v=1zSowOS4Wyg 중국이 근자 전승 80주년 기념식 군사 퍼레이드에서 보여준 구스 스텝goose step이 전파를 타고서 갖은 영상으로 재가공되어 잔잔한 화제가 되고 있거니와 저 구스 스텝이 무엇인지 그 내력과 전파 양상을 위키피디아 영문 항목에 기대어 정리한다.글자 그대로는 오리 발걸음을 의미하는 구스 스텝은 공식적인 군사 퍼레이드 및 기타 의식에서 행해지는 특별한 행진 스텝을 지칭하거니와 퍼레이드 대형으로 행진하는 동안, 병사들은 각자 자기 다리를 꼿꼿이 펴고 일제히 다리를 땅에서 흔들.. 2025. 9. 6.
[기고] 문화부 박미박람회와 국가유산청 국유산업전의 상생전략 두 문화 행사, 즉 '국가유산산업전'과 '박물관미술관 박람회'를 창조적 융합시켜 한국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한다. 하나는 과거의 유산을 답습하며 쇠퇴하는 길을 걷고 있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트렌드를 포용하며 성공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는 단순히 두 행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문화유산이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고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문화유산을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현재의 자산으로 만들기 위한 창조적 진단과 제언을 시도한다. 1. 관(官) 주도에서 민(民) 주도 협력으로의 전환현재 '국가유산산업전'이 겪는 어려움은 관 주도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관 중심 행사는 시장의 역동성과 민간의 창의성을 담아내기 어렵다. 반.. 2025. 9. 6.
예상대로 버벅버벅인 발해 묘지명 [2] 버벅댈 이유가 눈꼽 만큼도 없는 진릉珍陵 그렇다면 그제(5일) 동북아역사재단이 주최한 '용두산龍頭山 발해 왕실묘지: 1997, 2004-2005, 2008년 발굴보고' 분석 보고회에서 진릉珍陵 문제는 어떻게 보았는가?이 역시 예상대로 개발소발 께부작사부작 핵심도 짚지 못했으니 간단히 결론만 말하면 갸우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니와 이 대목 연합뉴스 보도는 다음과 같다. 발굴 조사 이후 20여 년이 지나 보고서가 공개됐으나,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도 있다. 효의황후 묘지에 적힌 '진릉대'(珍陵臺)가 대표적이다. 묘지에는 '그해 겨울 10월 24일 갑신에 진릉대에 천장(遷葬·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김)'했다는 문구(其年冬十月卄四日甲申, 遷葬於珍陵台禮也)가 남아있다. 권 선임연구원은 "기존에는 '진릉'을 고왕 즉, 대조영(재위 698∼719) 또.. 2025. 9. 6.
잉글랜드 왕국 초석을 닦은 초대 왕 에설스턴Æthelstan 잊힌 잉글랜드 초대 왕은 유명해질 자격이 있다!by 케임브리지 대학교 에설스턴Æthelstan의 새로운 전기는 서기 925년 대관식 이후 1,100주년을 기념하고, 그가 잉글랜드 초대 왕으로 불릴 권리를 재확인하며, 왜 그가 더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설명하고, 그의 수많은 간과된 업적을 조명한다.이 책 저자인 데이비드 우드먼David Woodman 교수는 서기 927년 에설스턴이 잉글랜드를 건국한 일을 대중이 더 잘 알도록 촉구한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와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서명signing of Magna Carta은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두 해 중 하나다.하지만 925년이나 927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케임브리지 대학교에.. 2025. 9. 6.
예상대로 버벅버벅인 발해 묘지명 [1] 왕비족의 경우 발해 황후 묘지에 새긴 '동국'…"'당 지방정권' 주장 맞지 않아" 송고 2025-09-05 17:42 김예나기자 동북아역사재단, 20여년 만에 발간된 효의·순목황후 묘지 분석 울씨 등 새로운 성씨 확인…문왕 가족 관계 등 역사의 '빈칸' 주목 "보고서, 당나라 영향 강조하기도"…향후 발해사 연구에 도움 될 듯 발해 황후 묘지에 새긴 '동국'…"'당 지방정권' 주장 맞지 않아" | 연합뉴스(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우리 황제의 성스럽고 밝은 교화는 태양이 비추고 하늘이 임한 것 같고, 우리 황후의 현명하고 지혜로운 계책은...www.yna.co.kr 예상대로다. 무슨 심층하는 분석과 그에 기반한 연구를 기대하겠는가?딱 보니, 소개 수준이었고, 딱 보니 번역 수준이었다. 무엇에 대한 번역인가?저 .. 2025. 9. 6.
아직 제대로 된 호칭조차 없는 19세기 유학모칭자들 19세기 유학모칭자들, 이라고 하지만이 숫자는 거대하다.많게 보면 전체 조선인구 절반 가까이 될 수도 있으며 적게 봐도 30프로는 넘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많아 봐야 인구의 20프로를 넘지 못하던 유학호가 19세기 중 후반에 이르면 인구의 60-70프로에 달하게 되는 탓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무더기로 유학호를 달게 되었는데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들을 부르는 호칭조차 변변한 게 없다. 그 당시부터 돌이켜 보자면, 놀고 먹는자들, 군역회피자, 향촌의 중인, 등등이 이들에 대한 호칭이며현대 한국의 학계에서도 유학모칭자, 항촌 중인, 등등을 비롯해 가짜양반에 이르기까지다양한 호칭이 있지만 무려 인구의 절반에 육박할지도 모르는 이 사람들에 대해 통일된 호칭이 없다. 이와 대응하여 가장 많이 쓰이는 호칭이 잔반일 .. 202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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