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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이색 정치학 고려말 지성계 주류로 침투한 주자성리학은 그 태생이 반불교다. 실제 그것을 집대성했다는 주희의 각종 어록엔 요즘 이단, 특히 불교에 대한 극언을 서슴지 않는 한국사회의 개독 윤리와도 흡사한 면모가 있다.하지만 이성계는 성리학과는 거리가 전연 멀었으니 첫째 공부는 거의 한 적이 없고 둘째 생평을 전장에서 말 위에서 보냈다.더구나 그는 철두철미 고려인이다.이건 여진족 계통이냐는 문제와는 관계없다.고려시대 지배계층 유학자들한테는 불교에 대한 증오가 거의 없다.이들에겐 공자와 석가가 한몸이다.김부식이 그랬고, 이규보는 더 했고, 이제현이 그러했으며 더구나 고려말 유학의 종장이라는 목은 이색 역시 철두철미 석가의 재가 신도였다.이는 석가를 증오한 소위 신지식인들에게 포박된 이성계도 마찬가지라 아들 방원이한테 쫓겨.. 2025. 2. 13.
길어진 수명... 한번 더 물어야 하는 천명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学,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顺,七十而从心所欲,不踰矩。수명이 길어졌다고 더 일해야 한다고 세상에서 난리이다. 필요하다면 더 일할 수 있겠지만, 길어진 수명의 시대, 공자께서 하늘에 물었던 천명을 나이 육십에 한번 더 물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다 못해 주나라도周雖舊邦 其命維新이라 하여 제후국에서 천자국으로 올라갈 때 천명을 다시 받았는데, 더 일해야 한다고 하면서 천명을 다시 묻지 않는 것은 안될 일 아니겠나? 육십 이후에 뭘 하고 살아야 할지 한번 더 하늘에 물어봐야 할 시대다. 2025. 2. 12.
크메르 제국의 와당 라오스 최남단 참파삭 주 왓푸[Vat Phou, 또는 Wat Phu 혹은 Wat Phuo] 라는 폐허가 된 크메르 힌두 사원 Khmer Hindu temple 복합체 출토 기와류다. 와당과 평기와 암키와가 다 보인다. 저것이 중국 문화 영향인지 아니면 자생적 발전 상황인지 알 수는 없다.와당을 보면 중국 영향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자신은 없다. 왓푸 유적 현지에 유적 박물관이 있으니, 그쪽에 전시 중인 유물을 그 옛날에 찍어둔 것이나 화질이 좋지 않다. 왓푸 유적에 대해서는 아래 참조 라오스 왓푸 사원, 그 역사와 유산, 그리고 그 보존을 위한 험난한 과정 라오스 왓푸 사원, 그 역사와 유산, 그리고 그 보존을 위한 험난한 과정근자 이 라오스 남부지역 참파삭 州 팍세 소재 왓푸 사원을 가는 분.. 2025. 2. 12.
오해 부르기 십상인 세책점 세책점 Sechaekjeom (Bookshops) 세책점貰冊店은 돈을 받고 소설책을 빌려주던 조선 시대의 책방입니다. 18세기 후반 서울에서 세책점이 성행하면서, 책을 사기 어려웠던 서민들도 대여료를 내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성이나 서민들은 홍길동전, 춘향전 같은 판소리계 소설이나 연애소설 등 한글로 쓰인 대중 소설을 즐겨 읽었고, 사대부 계층은 삼국지연의 수호전 같은 중국의 역사와 영웅담을 다룬 소설을 선호했습니다. 세책점은 다양한 문학 장르를 제공하며 서울의 문화와 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설명이 이렇다.당시 서민 대다수는 까막눈이었다.사대부 여성들은 한문을 실은 거의가 몰랐고 언문만 알았다.서민들이 무슨 대여료 내고 책을 빌렸겠는가?낭송해주는 책을 들었을 뿐.. 2025. 2. 12.
보관 관리가 골치가 된 목판 조선 후기 문집 간행이 왜 목판으로 유행하게 되었는가서울역사박물관 안내가 저렇다.이런 말로 왜 목판에 환장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더구나 저런 문집 간행이 식민지시대에 가장 활발한 이유도 설명하지 못한다.이미 구닥다리가 된 목판을 왜 굳이 저 시대에 제작했겠는가?그 자체 신주였기 때문이다.신주로서의 목판.이는 심대한 환경 공해 문제를 유발했다.똥폼 낸다고 제작하기는 했는데 보관이 문제였다.무엇보다 돈이 열라 들었다.근자에 왜 문중에서 목판 기증이 많은가?간단하다.돈 때문이다.신주니 쉽사리 버리지도 못하니 글타고 안고 가자니 골치다.그래서 다 바리바리 싸들고 박물관으로 기증 기탁한다. 2025. 2. 12.
난지도가 섬이던 1966년의 서울 1966년 발행 최신서울특별시전도다.59년 전 서울 사정이 당연히 담길 수밖에 없다.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 내역을 반영한다.잠실이 당시엔 섬이다.훗날 아래쪽 갈래를 막아 대규모 택지개발을 했다.지금의 석촌호수는 본래 막은 한강 물길 흔적이다.광진교가 보이고 풍납토성이 희미하게 드러난다.여의도다.당시엔 비행장이었다.용산 일대다.난지도 역시 섬이었다.섬이던 시절 흔적이 고스란하다.강남은 허허벌판이다.서울역사박물관에서. ***  내친 김에 저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 역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면 1977년 1월 7일부터 7월 25일까지 제방을 쌓으면서 육지로 변하면서 쓰레기 매립장이 된 이후 1993년 3월 19일 그 역사를 마감한다. 이후 생태공원으로 변모해 오늘에 이른다. 2025. 2. 12.
필사, 활자, 목판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필자가 깊이 알지 못하면서 굳이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이렇다. 우리나라 필사, 활자, 목판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 책이 이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를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책이 하필 그런 형태로 나왔는가 이것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활자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서구 인쇄사로 보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만들었지만서양처럼 인쇄혁명까지 이르지 못했다.대량생산까지 가지 못했다. 이것은 서양 인쇄술에서 파생한 기름짜는 프레스를 쓰지 않아서 그렇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서양 인쇄사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책 제작이라는 전체 구조물 안에서 인쇄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 쓰였는가를 한 번 보.. 2025. 2. 12.
갯벌이 발달한 한반도의 미스터리, 왜 보그 바디 bog body가 없을까? 유럽에서는 이런 유해가 곳곳에서 출현한다. 아일랜드에서도 그랬고 네덜란드에서도 그랬으며 덴마크에도 있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플로리다인가? 이쪽에서 보인다. 유럽 대륙의 경우 네덜란드와 독일 쪽 대서양 혹은 북해 해변은 온통 뻘이며, 드넓은 평야와 초원지대가 발달한 아일랜드나 영국 같은 데서는 땅 자체가 습지가 많고 그런 까닭에 켜켜한 나무 풀때기가 썩어 형성된 독특한 환경, 곧 니탄泥炭 혹은 이탄층이라 일컫는 peat 지질층이 발달했으니, 저것이 궁극으로 훗날 석탄으로 발전하겠지만, 저 땅은 내가 가서 직접 여러 번 살피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썩어가는 과정에서 물기를 잔뜩 머금고 탄화한 흙 자체가 pre-석탄이라 그걸 캐서 말려서 지금도 연료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지질이 인문학적 배경과 .. 2025. 2. 12.
중국에는 오래된 금속활자본이 발견될까 한국의 금속활자본이 부러운 중국이 금속활자본을 찾고 있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중국에는 우리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본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없는 게 없다는 중국이니까.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동아시아 인쇄의 역사에서 금속활자가 존재하는 조건은 매우 국한적이다. 찍어내는 발행부수, 종이의 가격, 등등 여러 가지를 조합하여 특정 조건을 만족할 때 금속활자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데, 예를 들어 찍어내야 할 발행부수가 너무 많아지면필자가 보기엔 금속활자가 목판인쇄로 다 넘어간다. 그 증거는 일본 에도시대에 있다. 중국도 금속활자를 먼저 썼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존재했더라도 아주 짧은 시기에 지리적으로도 국한된 지역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 역시 일본처럼 금속활자가 계.. 2025. 2. 12.
장경각, 신주神主로서의 목판 신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종가, 혹은 서원 같은 데서 빠지지 않은 공간으로 장경각藏經閣이 있다.물론 이 장경각은 경판각이니 하는 다양한 이름으로 일컫기도 하니, 예컨대 권문해가 편찬한 백과전서 대동운부군옥 목판을 보관하던 공간은 초간정草澗亭이라 해서 마치 정자처럼 일컫지만 실제로는 장경각이다.이 장경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내가 보건대 제대로 접근한 글이 없다. 그렇다면 장경각은 무엇인가?사당이다!신주다! 이 장경각은 예외가 없지는 않지만, 서원이나 해당 종가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사당 인접지점에 위치한다. 신성공간이라는 뜻이다. 이는 장경각이 지니는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장경각과 목판은 어떤 관계인가?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서 우리는 왜 조선시대가 그토록 목판에 목을 매었는지 그 .. 2025. 2. 11.
함안 말이산 고분군 진입로에서 찾은 4~5세기 무덤 아라가야 시대 왕릉을 포함한 지배계층 묘지임이 확실한 경남 함안 말이산고분군에서 4세기 말 혹은 5세기 초 무렵에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무덤임이 확실한 흔적 하나가 새로 발견되고, 그에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각종 도기 26점이 떼로 발견됐다. 함안군은 국가유산청 보수정비사업 일환으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해동문화유산연구원(원장 천신우)에 의뢰한 ‘함안 말이산고분군 진입로 개선공사 부지 내 발굴조사’에서 이런 성과를 봤다고 말했다.군과 조사단은 이번 성과를 두고 "아라가야 토기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이들 도기류는 길이 3.1m, 너비 1.6m인 대형 목곽묘 유물 껴묻거리 공간으로 추정하는 곳에서 확인됐다.그릇 모양새로 보면 26점은 그릇받침 8점, 항아리 14점, 뚜껑 2점, 굽.. 2025. 2. 11.
활자인쇄의 경제성 이 부분에 대해 필자의 의견이 조금 더 남아 써 본다. 흔히 우리나라 활자인쇄에 대해서는, 선학들의 연구로 그 발전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리고 흔히 활자인쇄에 대한 평가로는위대한 문화적 성과이지만 구텐베르크 인쇄처럼 광범위한 지적 산업적 혁명을 일으키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라고 결론내린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우리나라의 활자인쇄는 어쨌건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는 점이다. 활자인쇄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돈은 정직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는 발행부수가 활자인쇄로 가능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장기간 계속되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자인쇄는 사회 전체에 보편화한 것이 아니라 국가주도의 사업으로 남았다. 이건 .. 2025. 2. 11.
다양한 제책 기술: 폼잡는 목판 결국 이건 김 단장께서도 쓰신 내용이지만전통시대의 우리나라 목판은 목판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도 많았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팔만대장경.이건 필자가 보기엔 목판 각출 자체가 목적이다. 책을 만들어 찍어내는 건 그 다음 이야기고, 길이 전할 법보 목판을 만들어 내는 그 자체가 더 큰 목적이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목판 자체가 목적인 경우가 꽤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런 부분까지 더 하면, 우리가 조선시대에 필사, 활자, 목판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인쇄물을 만들기에 앞서 복사할 것인가, 인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목판 자체가 목적인가, 완벽한 교정이 목적인가, 보안이 목적인가, 소수 사람이 보는 출판물이 목적인가 되도록 많.. 2025. 2. 11.
조보는 왜 필사본인가 그렇다면 조보는 왜 필사본인가. 이는 전현직 고위 관료 및 지방 수령 등 소수의 사람들만 원칙적으로 돌려보게 되어 있었으니이거야말로 활자 인쇄가 적합한 것 아니겠는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조보가 활자로 안 간 것은 보안 때문이다. 가독률이 좋은 잘 찍힌 조보는 결국 보안상 되려 위험해지니초서로 일일히 필사해서 내려 보낸 것 아니겠는가. 아마도 초서로 일일히 필사하는 것이 인쇄 해버리는 것보다 이 경우 품이 더 들었을 것이다. 시간적 경제적으로 불리한 데도 필사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문서가 활자본이냐 목판본이냐 필사본이냐는그 자체 선택에 있어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고 다양한 부분이 고려되었을 것이며 이런 부분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규명을 시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2025. 2. 11.
왕조실록은 왜 활자인쇄인가 필사한 예외도 있지만 실록은 활자본으로 안다. 왜 활자인가. 달랑 다섯 부 아닌가? 읽기 쉽게 활자를 썼다고 할지 모르지만조선시대 외교문서 등 정자체로 써내려간 필사본을 보면충분히 아름답다. 충분히 가독률도 좋다. 그렇다면 다섯 부를 활자인쇄한다는 것은 무슨 메리트가 있었을까? 경제적 이득이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이런 경우 필자가 보기엔, 짐작을 해보자면교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필사를 다섯 부를 하면교정을 다섯 번을 해야 한다. 필사를 해놨으니 빨간색으로 표시를 할 수도 없다. 활자를 쓰면 한 부 먼저 인쇄하여 그것을 계속 교정하고 OK하면다섯부 쭉 밀면 된다. 이때는 제대로 먹을 안먹은 부분이 있는지만 보면 되는것 아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는몇 부를 찍었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활자본을.. 2025. 2. 11.
복사를 할 것인가 인쇄를 할 것인가 우리는 인쇄물을 만들 때 고민을 한다. 복사를 할 것인가, 인쇄를 할  것인가, 필자는 인쇄업을 모르는지라 이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부수가 애매하면 인쇄하는 분들이마스터 인쇄를 하시지요, 하고 권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인쇄법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은 결국 돈 문제다. 적은 돈으로 최대의 결과물을 뽑으려 하다 보니 이런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그 사회는 몇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필사를 할 것인가, 목판으로 할 것인가, 활자를 쓸 것인가, 이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는 다양한 고려가 있었을 텐데그 중 하나가 돈 문제일 것이다. 그 외의 부분들- 예를 들어 보안문제라던가, 부수가 적은데도 왜 조선시대 조보는 필사되었는가, 보안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 많은 부분에서 어떤 .. 2025. 2. 11.
신라 이름(3) 한 글자씩 선대서 물려받는 신라의 존호 중국식 존호, 이는 앞으로 내가 다룰 기회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도교 신학에서 유래하는 이 새로운 존명법은 또 다른 특징이 한 글자씩 선대를 물려받는다는 특징이 있다. 신라 중고기 왕들, 법흥法興과 진흥眞興은 興자를 공유했고, 다시 그 아래 아들과 손자인 진지眞智와 진평眞平은 도교 신학 최고 경지에 오른 진인眞人에서 유래하는 眞을 공유했으며그 다음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은 德을 돌림했다. 저 중고기에는 조선시대 관념으로는 형제간 돌림, 곧 항렬로 볼 만한 여지가 있는 공유 글자도 등장하는데, 진흥왕 자제들의 경우 불교적 색채가짙은 륜輪이라는 글자를 집중으로 해서 공유하거니와 현재 확인되는 그의 아들딸로 저 글자를 공유한 이들은 동륜銅輪, 금륜金輪, 은륜銀輪, 구륜仇輪이 있다. 이 중에 은륜은 딸이며 나머지는 .. 2025. 2. 11.
지닌 공포 엄습한 산토리니 뉴스를 되도록 멀리하는 삶을 사는 백수생활이라, 실은 조금전까지도 산토리니가 지진으로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그러다가 조금전 술먹는책방을 다녀간 서울신문 이미경 논설위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 이야기를 듣고선 산토리니로 검색하고선 비로소 저런 재앙에 직면한 산토리니를 접한다. 저 산토리니가 나한테 유별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직전 감행한 물경 3개월짜리 유럽 장기여행 답사지 중 하나로 그곳이 포함된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에게해를 정좌한 이 작은섬에는 지진으로 매몰한 고대 도시 아크로리티Akroriti라는 데가 있는 까닭이다. 저 아크로리티는 여러 번 내가 소개했듯이 그리스의 폼페이라 일컫는 곳이라, 두 도시 모두 화산 폭발로 매몰한 고대도시라, 저곳을 폼페이에 견주기는 하지만, 서기.. 2025. 2. 11.
언지매구言之浼口, 중국에 빡친 어느 대감님 앞서 잠깐 관왕묘, 곧 관우 사당이 임진왜란 참전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침투한 일을 그것을 증언한 윤국형尹國馨[1543~1611] 갑진만록甲辰漫錄을 통해 논급했거니와 주로 임란기를 전후한 소소한 이야기 모음인 이 만록에는 조선을 오는 중국 사신들 적나라한 행패, 특히 돈을 밝히는 양태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 대목이 있다. ○ 중국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온 사람 중에 태감太監[환관]은 으레 많은 뇌물을 요구하고, 문관은 혹 청렴하고 간결하여 법도로 처신하고, 혹은 시주詩酒와 풍류風流로 그 이름을 남기기도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저 평범할 따름인데, 아무리 청렴치 못하다는 비난을 듣는 사람이라도 태감 무리보다는 나았다.내가 본 사람으로는 정묘년에 온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재주가 있고 기품이 맑고 근.. 2025. 2. 10.
[안압지 신라 동궁론을 심판한다](6) 핵심은 건딜지도 못한 엉성 발굴 계속 인용하지만 현재까지 안압지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라 동궁東宮 권역 발굴 양상이다. 저 안압지가 동권 권역 핵심일 것이라는 데는 나도 이견이 없으니, 저 연못을 중심으로 주변으로 동권 권역을 형성하는 대규모 건축물들이 시대를 달리하며 들어섰을 것이다. 저 발굴 양상을 보면 뭔가 나사가 단단히 빠졌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간단히 더 정리하면 지금까지 동궁 권역은 안압지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과 서쪽 인접 지점만, 것도 극히 일부만 팠고, 남쪽 주차장 부지를 더 지극히 일부 발굴했을 뿐이다. 저 안압지가 동궁 권역 중심이라면 진짜 앙코가 빠졌다. 그렇다면 동궁 권역 앙코는 어딘가?이건 삼척동자도 안다. 등신이 아니라면 알고 개돼지도 삼년만 훈련하면 안다. 이곳이다. 지금의 안압지를.. 2025. 2. 10.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중국, 그것이 이상했던 조선 지식인 ○ 옛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 사실이 전기傳記에 나온 것이 역력히 말해 주고 있고, 우리 나라의 풍속 또한 그러하였다. 그런데 임진란 이후로 중국의 대소 장관과 정동征東[일본 정벌]의 사졸들이 전후에 몇천 만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데, 모든 음식을 먹을 때 마르고 국물이 있는 것을 가릴 것 없이 전부 젓가락만을 사용하고 숟가락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니, 어느 때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의 말에는, ‘대명 고황제大明高皇帝의 유훈遺訓에 진우량陳友諒을 평정하기 전에는 음식을 먹을 적에 감히 숟가락을 쓰지 말라 하여 그 꼭 취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 그대로 습속이 되었다.’고 하나, 그런지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고관대작을 거푸 역임하며 임진왜란기를 보낸 윤.. 2025.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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