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20011 [문화재기자 17년] (24) 세비야에서 겪은 이건무(1) 세계유산위원회 얘기가 나온 김에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 일화로써 이건무 선생 얘기로 들어가 볼까 한다. 당시 그는 문화재청장이었다. 두계 이병도 손자인 그는 깐깐한 인상을 주며, 실제로도 과묵한 편이고 꼬장꼬장한 공무원으로 소문이 났다.결코 드러내는 성정이 아니라 일 처리 역시 조용한 편으로 평가된다.그런 까닭에 기자들과 사이가 나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다고도 할 수 없었다.더 툭 까놓고 말해 기자들에게 그는 재미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특별히 친한 기자도 없는 듯 했고, 그렇다고 척을 진 기자도 없었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이렇다 할 맛이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이건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역시 그랬다. 나서는 성격도 아니요, 그렇다고 무슨 .. 2025. 2. 24. 말로만 듣던 보로부두르 앞에 서서 borobudur, central java, indonesia march 1st, 2013 이 보도부두르는 내가 명색이 문화재업계에 투신한 지 이미 당시에도 오래였지만, 좀체 연이 없었으니 뭐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일수록 외려 남들 다 가는 데 가기가 여간 어렵지 아니해서 주변 지인들을 봐도 다 그렇다. 외려 저런 명승을 다 싸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엉뚱해서 같은 기자라 해도 농땡이 치는 놈들일수록 더 좋은 데는 더 많이 싸돌아다니는 기현상이 벌어지거니와 꼭 이런 말 하니 내가 꼭 그렇다 하는 꼴이라 못내 조금 뒷골이 뻐근하기는 하다만 그래 솔까 나는 한때 일에 미쳐 살았고, 그 일이 좋아 열광하며 살았다. 암튼 저 보로부두르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인도네시아 자체가 나하는테는 저때가 처음.. 2025. 2. 24. 하나 같이 지랄 맞은 너무나 유명한 고전과 고전들 소위 널리 알려진 관심 분야 고전이라 해서 다 걸신 걸린 듯 순식간에 읽어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이 두 서양 고전,곧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기와 타키투스 게르마니아는돌이켜 보건대 매양 읽다가 집어치다를 반복했으며 더구나 일본어 영어판 중역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엔 그 번역 신뢰성에 의문이 일어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명한 영어 번역본으로도 읽자 해서매양 영문판을 구해다가 독파를 시도했다간 번번이 좌절한 기억만 아련하다.걸신 걸린 독서는 열정 열광이 있어야 한다.지금 요이땅 외치면 쳐들어간다.(2016. 2. 24)*** 그래서 저 두 고전은 마파람 게눈 감추듯 해서 해치웠는가?그리 강렬한 기억이 없으니 둘 중 하나였으리라.읽기는 했지만 재미가 없었거나 가다가 중단했으리라.고전은 언제나 재미랑 거리가 멀다.고.. 2025. 2. 24. [해혼후묘海昏侯墓] (1)은행을 발굴하는 사람들 2000년대 들어 중국 강서성江西省 남창시南昌市에서 느닷없없이 출현한 서한 시대 중기 폐제废帝 창읍왕昌邑王 해혼후海昏侯 유하刘贺 능묘陵墓 발굴성과 역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바, 앞서 여러 번 다루기는 했지만 이번엔 좀 시간을 들여 하나씩 단을 지어 정리를 꾀하고자 한다.이 무덤은 2015년 도굴을 계기로 알려지고 발굴조사가 착수되어 그 전모를 드러냈거니와무엇보다 무덤에 동전만 10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을 쏟아부었으며뿐만 아니라 즉시 현금화가 가능한 금은 6만그램 넘게 현재까지 수습되었다. 이 황금은 상자 안에서 발견되었고 크기는 하나씩 아이들 손바닥만했다.어떤 상자에는 금병이라 일컫는 금덩이가 적어도 70~80점이 있었다.다른 칠기 상자에서도 모두 황금만 나왔다. 어떤 것은 말발굽처럼 생겼고, 어떤 것.. 2025. 2. 24. [마왕퇴 스핀오프] 중국 남방 문화와 초 문화 앞에서도 계속 말했고, 뒤에서도 계속 강조하게 되겠지만, 저들 집안이 터잡은 장사長沙는 지금도 그렇지만 강고한 남방 초 문화 전통에 뿌리 박고 있으며, 이런 유구한 전통은 그들이 진秦 혹은 한漢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구사한 통일 왕조가 들어선 뒤에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에서 초 문화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거니와, 이 남방 초문화는 간단히 정리하면 건조한 고원지대 잡곡 중심 황화 문명에 견주어 걸핏하면 범람하는 장강을 기반으로 삼는 저지대 평야 문화이며, 그런 까닭에 물[水]이 차지하는 위치가 막중막비하고, 종교 사상이라는 관점에서는 황화 문명 합리주의에 견주어 무巫 문화 전통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둔다. 일본의 중국 도교 중심 종교사상사가 후쿠나가 미쓰지福永光司는 내 기억에 .. 2025. 2. 24. [마왕퇴와 그 이웃-11] 문화대혁명 광풍 속 고고학자들 다음의 조연은 당연히 현장의 고고학자들이다. 마왕퇴가 발굴되던 당시의 중국상황은 험악했다. 1966년 시작한 문화혁명은 아직 불길이 다 잦아든 상태가 아니었다. 마왕퇴 발굴이 1971년에 시작하여 1974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문혁에 의한 공자 비판이 1973년에 시작되어 곽말약이 공자를 숭배한다고 비판받아 스스로 반성문을 써야 할 정도로 정세는 불안정했다. 이 당시 홍위병이 곡부의 공자묘를 습격해 크게 훼손한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정세에서 사실 마왕퇴 발굴과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은 일이나 다름 없었다. 중국에서 나온 마왕퇴 발굴 관련 저서를 보면이 당시 고고학자들의 생고생을 낱낱이 적어 놓은 것이 많은데 물론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게 완벽하지는 못한 것이.. 2025. 2. 24. 동전만 10톤을 쏟아낸 강서성 해혼후海昏侯 유하刘贺 무덤 무왕돈 초나라 대왕묘며 마왕퇴 한묘니 하는 이야기가 조금은 신물이 넘어오는 듯해서 이전에 상세히 다루기는 했지만 잠시 외도한다. 강서성 해혼후海昏侯 유하 묘刘贺墓라는 데다. 전한 중기 창읍왕昌邑王으로 있다가 소제少帝 황제가 후사 없이 죽자 당시 권신 곽광이 느닷없이 후계자로 지목하는 바람에 느닷없이 창읍에 있다가 업혀 와서 강제로 황제 자리에 앉았지만 황제 되고선 룰루랄라 황제된 맛이 이 맛이여 하면서 룰루랄라 탱자탱자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겁대가리 상실한 어린 황제가 창읍에 있던 조무래기들까지 바리바리 끌고와서는 벼슬자리 주고 하니 가만 두었다간 나라 거덜나겠다, 아니 내 권력 절단나겠다 위기감 느낀 그 곽광이 느닷없이 너 그 꼴로는 종묘 사직 보존 못하니 그만 해야겠다. 내리 와레이 해서는 ..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10] 의학자와 文士의 기로에서 앞에서 쓴 곽말약 이야기를 조금 더 써보겠다. 곽말약은 앞에 쓴 것처럼 큐슈제대 의학부 출신 의학사-의사인데 졸업한 해가 1923년. 당시로서는 최고수준 학벌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래도 환자를 직접 봤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니 졸업과 함께 의사는 사표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겠다. 곽말약 글을 보면 의학자 특유의 섬세함과 날카로움이 보이는데, 추리소설 작가로 명성을 날렸지만 셜록 홈즈 소설에서 의사 특유의 문진법을 추리에 그대로 적용한 코난 도일처럼 의대에서 보낸 본과 4년은 그의 평생에 깊은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곽말약과 마왕퇴 미라 관련해서는 두 개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라 맞는지 틀리는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중국 쪽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이 이야기는 언제나 인용되는 부분..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9] 곽말약郭沫若(1892~1978) 다음으로 마왕퇴 발굴의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한 또 다른 저명인사는다름 아닌 궈모뤄, 곽말약이다. 마왕퇴 미라가 발견된 후 제대로 된 의학적 조사가 시행될 때까지 여러 고비가 있었는데이럴 때마다 급한 불을 끈 사람은 당시 총리 주은래이며 중국과학원 원장 곽말약이다. 마왕퇴 조사에서 대체적인 방향 제시를 주로 했던 주은래와 달리곽말약은 마왕퇴 미라 조사 때 매우 전문적인 사항을 지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라에 대한 의학적 조사가 시작되기 전 곽말약이 연구진에게 남긴 메모가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상당히 구체적이며 의학적으로도 합리적이라 볼 만 하다. 곽말약이 이처럼 마왕퇴 미라에 대한 의학적조사에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그가 일본에서 의대를 졸업한 의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곽말약 연표를 보면..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8] 주은래周恩来 마왕퇴 발굴의 주연은 당연히 마왕퇴 무덤일 것이다. 그러나 이 발굴은 당시 중국의 정치적 정세가 무척 불안정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의 민도와도 겹쳐 수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마왕퇴의 스토리를 만드는데 거든 조연을 순서대로 소개해 보겠다. 가장 먼저 주은래-. 소위 중국 공산당의 영원한 2인자로 국공내전 이전부터 시작해서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실각한 적도 없고 항상 마오의 바로 아래 2인자 자리를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인물이 항상 주은래의 비위를 맞추기만 했던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마오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 혼란의 시기에 나침반처럼 항상 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고 해도 되겠다. 주은래는 마왕퇴 발굴에서도 그런 역할을 했다. 마왕퇴가 전한 시대 무덤이라는 것이 확인되고 그 안에서 무.. 2025. 2. 23. 2009년 여름 세비야와 세계유산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 보기에서 퍼온다. 이 사진과 아래 첨부사진을 전재하면서 내가 적기를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Being Inscribed on the World Heritage List at the 33rd World Heritage Committee Held at Seville, Spain on June 27th, 2009 라 했으니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던 그 순간을 촬영한 장면 중 하나다.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이고 그 왼쪽이 외교부 어느 담당 국장이셨는데 성함은 까먹었다. 저 조선왕릉 등재 때 한국 취재진으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현장을 지켜 보며 관련 기사를 썼..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7] 핵 방공호를 파다 찾다 앞에서 이야기한 핵공포와 방공호-. 1969년 소련이 자국산 핵무기 상당수 탄두 방향을 중국 쪽으로 돌리면서중국의 공포는 격심해졌다. 이 때문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핵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방공호 파기가 전국적으로 붐이 일었는데인민해방군 사령부의 방공호가 호북성 지역에 만들어진 것처럼 호북-호남성 일대도 핵 방어용 방공호가 여러 곳 지어졌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장사시 병원 부지에 들어설 계획이었다. 그런데 막상 파다 보니 범상치 않은 광경이 목격되었다. 열심히 파다 보니 고령토가 나오기 시작했고 파 들어간 구멍에서 기체가 솟아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옆에서 무심코 담배불을 붙이던 병원 원무처장이 불을 다 붙이기도 전에 구멍에서 솟아나온 기체에 불이 붙어 폭발해 버린 것이다. 이.. 2025. 2. 23. 화장실 문화가 꽃 필 날을 기다리며 요새 간헐로, 그리고 때로는 집중해서 화장실 이야기를 한다. 어린 시절 짚으로, 새끼줄로 뒤딱이를 해결하고, 통시가 대표하는 그런 열악한 화장실 문화를 겪어 지금 수세식 화장실 시대에 이른 내가 이런 점들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기생충으로 고생한 기억이 생생하거니와, 그 기생충 감염 통로는 누구나 예상하는 그런 것들이라, 그 대표하는 통로가 실은 인분이라는 비료에서 말미암았다. 내 고향 김천을 기준으로만 해도, 지금과 같은 수세식 변도를 도입한 시대는 오래지 않아서 때마다 그 반동에 고생한 기억이 생생하다. 단순히 이런 시절 기억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곧 위생 문제요, 그것이 곧 사회문제인 까닭에 더욱 저 화장실 문화는 내가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둔다. 로마시대 공중 화장실 문화를.. 2025. 2. 23. [마왕퇴 스핀오프] 마왕퇴를 왜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도록 봐야 하는가? 호남성 장사長沙 교외 마왕퇴馬王堆 한묘漢墓 중 미라가 나온 곳으로 저명한 제1호 무덤 목재 결구 단면도다. 서한 왕조 제후국 장사국長沙國 그 제후왕도 아니요그 승상 무덤도 아니요그 승상 마누라 무덤을 이렇게 만들었다.그렇담 동시대 제후국 위만조선 그 왕가 왕릉은 어떠해야 하는가?개돼지도 안다.어떤 구조, 어떤 규모여야하는지를.저와 비슷한 구조이면서 저보다는 훨씬 규모가 커야 한다. 평양?웃기는 소리 작작들 좀 하세요.평양엔 저 시대 저런 무덤 없다. 서한 제후국 중 하나인 장사국그 장사국 제후왕 무덤도 아니요그 아래 승상 마누라 무덤을 장식하고자 쓴 칠기 관과 곽이다. 제후국왕도 아니요 그 승상도 아니요, 그 승상 마누라 무덤이 이렇다. 그렇다면 어엿한 제후국왕, 혹은 그에 버금하는 위만조선 왕릉은.. 2025. 2. 23. 대후軑侯, 4개를 이은 장사국의 실력자 집안 리창利苍(?~기원전 186년)은 전한 열후列侯이며 장사국长沙国 승상丞相을 역임했다. 전한前漢 혜제惠帝 2년(기원전 193년) 4월, 장사국 승상이 됨으로써 대후轪侯[軑侯]로 봉해졌다. 한 고후高后 2년(기원전 186년), 사망했다.열후列侯란 간단히 말해서 국가에서 받은 봉작, 곧 벼슬 타이틀 중 하나로서 본래는 철후徹侯라 했지만, 한 무제 유철劉徹 이름을 피한다고 해서 저리 바꾼 것이다. 리창은 여러 책에서 등장하지만 이름이 다른데 사기史記 중 혜경간후자연표惠景間侯者年表[혜제와 경제 시대 후侯에 책봉된 사람들을 연대순으로 배치한 표라는 뜻이다]에서는 "리창利仓"이라 하고, 당나라 시대에 나온 저명한 사기 주석서 중 하나로 글자 그대로는 사기의 숨은 뜻을 찾아내겠다고 포방한 사기색은史記索隐에서는 "대후 .. 2025. 2. 23. 덴마크 습지 미라 보렌모제 맨 & 워먼 보렌모제 미라 Borremose bodies 는 덴마크 히머랜드Himmerland 지역에 있는 보렌모제 이탄 습지 Borremose peat bog에서 발견된 미라 혹은 인골 세 구를 말한다. 1946~1948년에 발견된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으로, 이들은 북유럽 청동기 시대 Nordic Bronze Age를 살았다고 추정한다.그에 앞서 1891년에는 너무나 유명한 군데스트룹 콜드론 Gundestrup cauldron이 근처 늪지bog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보렌모제 맨[Borremose man]1946년 보렌모제Borremose 이탄 습지 최남단에서 이탄 채굴자들peat diggers이 발견했다. 처음에는 살인 피해자가 아닌가 했다가 나중에 보그 바디로 확인됐다.시신은 자작나무 막대기 층 layer o.. 2025. 2. 23. 발굴 반세기 전문가 하나 없는 마왕퇴 계속 말하지만 전한시대 무렵 중국고고학은 범위를 좁히면 그것이 곧 한국고고학이다. 위만조선? 계속 이야기하지만 저 시대 마왕퇴며 남월왕묘며 중산국 유승 무덤을 보면 헛소리 더는 못한다. 평양? 다 좋다. 한데 저에 비길 만한 건덕지가 평양 일대 한반도는 없다!위만 혹은 그 왕가 무덤이라면 저 만한 데가 나와야 하는데 없다!규모만이 아니다. 계속 말하지만 저 시대 제후왕 혹은 그에 버금하는 사람들 권력자 무덤은 모조리 지하궁전이다. 아예 산을 뚫고 들어가서 거대한 지하궁전을 만드는 형식이다. 무덤 양식은 전부 판대기 무덤이다. 방은 시체 안치하는 중실中室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이실耳室이라 해서 각종 껴묻거리 묻어두는 딸린 방이 가득가득해야 한다. 지하를 뚫어 들어간 지하궁전.더구나 딸린 방이 많아야 하는 이..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 - 6] 위만의 무덤은? 마왕퇴 무덤은 장사왕의 승상이자 자신의 봉국을 가지고 있던 전한의 열후列侯의 무덤이다.구체적으로는 열후인 轪侯 리창 가족 일가 공동묘지다. 이 무덤은 크기에다가 부장 유물이 어마어마하지만, 그래도 그는 장사왕의 승상이었고, 대후로서 왕은 아니었다. 제후국 안의 작은 제후국 왕이었다. 전한 때 만든 무덤 중 왕의 무덤으로는 남월왕 무덤이 있고, 또 중산국왕 무덤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 단장께서 여러 번 자세히 쓰신 바 있으므로 더 쓰지 않겠다. 마왕퇴와 남월왕 묘를 보면, 역시 이전 김 단장 지적대로 동시기 조선의 왕인 위만 일가의 왕릉이 존재한다면 어느 정도 크기여야 하며, 나아가 그 구조는 어떠해야 하는지 대강 추정이 가능하다. 위만의 조선은 사기를 보면 항상 조타의 남월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나..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 5] 중국의 핵 방공호 1969년 발발한 중소국경분쟁 여파로 소련이 핵전쟁까지 들고 나오자 당장 급한 쪽은 중국이었다. 당시 중국은 핵은 있었지만 투하 수단이 마땅치 않았고 소련은 아직 미국과 함께 전 세계를 양분한 초강대국으로 양국간 핵전쟁이 발발하면 그 결과는 뻔했기 때문이다. 마왕퇴에 대해 쓴 책을 보면 항상 가장 앞에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는 마왕퇴를 발견한 계기가 된 방공호를 파던 이야기.두 번째는 임표의 비행기가 추락해서 사망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대개 이를 건너 뛰고 이해하게 되는데 사실 이 두 사건은 마왕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인 문화혁명이나 미중 데탕트와도 관련이 있다. 중국이 소련의 핵공격에 대한 위협이 1969년 나오자 가장 먼저 서두른 것은 핵방..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 4] 중소국경분쟁 마왕퇴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건이 있다. 중소 국경 분쟁이다. 지금 우리나라 젊은 세대는 이미 이 사건은 잘 모르는 시대에 접어들어 조금 설명해 둔다. 이 사건의 이해가 마왕퇴를 둘러싼 전반적 일의 전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까닭이다. 마왕퇴는 문화사적 대발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다. 알다시피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이다. 소련은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최후에 공산당이 승리할 때까지도 중국의 혁명역량을 믿지 않았다. 중국은 낙후한 농업국가로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소련의 입장에서는 중국혁명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혁명이 아니라 일종의 변종에 가까왔다.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일대를 풍미했던 마오이즘과 .. 2025. 2. 23. [마왕퇴와 그 이웃 3] 초나라의 땅, 장사 앞에 김 단장께서 올린 지도로 장사국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었지만 ( 한나라 초기 제후국들과 장사국 ) 이 지도도 한 번 봐주기 바란다. 전한의 판도를 그린 지도로 짙게 표시된 지역일수록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이 지도를 보면 전한 대까지도 초나라 땅은 인구밀도가 매우 낮음을 알 수 있다.바로 이것이 거대한 판도를 다스린 것으로 알려진 초나라가 중원국가에 압도적이지 못했던 이유이다. 중원국가들은 영토도 작고 약소국 같지만 인구수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마왕퇴 이야기 배경이 되는 장사 지역은 더더욱 인구가 희소하다. 이 지도를 보면 장사 지역은 한반도 낙랑과 현토보다도 인구밀도가 낮다. 마왕퇴의 화려한 무덤은 바로 이처럼 인구가 희소한 초나라 땅에 등장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만든 한묘漢墓는.. 2025. 2. 23. 이전 1 ··· 72 73 74 75 76 77 78 ··· 95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