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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316

석굴암 천장이 금이 갔다고 금새 무너진다던 그때 그 시절 문화재 사기행각이 판을 치던 작년. 그런 문화재 사기 행각 중에 석굴암이 위험하다는 낭설이 횡행하기도 했다. 그런 위험의 증좌로써 석굴암 천정에 간 금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보도와 그런 보도의 바탕이 된 이른바 전문가라는 자의 지적질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삼국유사 석굴암 창건 이야기도 읽어보지 않는 기자와 전문가의 무식을 폭로한 일대 사건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저 천장의 세 줄기 금은 석굴암 창건기에 갔다. 함에도 저와 같은 얼토당토 않은 문제 제기가 먹혀들어 급기야 문화재 애호가를 자처하는 대통령 박근혜가 현장에 출동하는 희대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이를 보도한 해당 언론, 이를 지적질한 이른바 전문가 그 어느 곳도 아직 오보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 한 마디 없다. 사진은 2012년 9월 28일.. 2024. 3. 14.
[自述] 돈 끌어와 개최한 고구려 고분벽화 학술대회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따로 놀기 마련이라, 좋은 의미에서 시작한 일이 꼬이는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고구려 고분벽화 전시회 개최와 관련해 주최한 학술대회가 그러했으니, 이야기인즉슨 이랬다. 연합뉴스가 일본 교도통신, 한국의 서울역사박물관과 공동으로 '인류의 문화유산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2006. 9. 2∼10. 22)을 개최했거니와, 이 전시회는 현재까지 나로서는 내가 직접 간여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였으니, 이후에도 간접으로 회사 주최 전시회에는 이런저런 식으로 손을 대기는 했지만 다 간접이었으나, 이 전시만큼은 내가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처음과 끝을 함께했다. 이 전시회 관련 논급은 여러 군데 했으니, 중복을 피하기로 하고 이 전시회를 막상 개막하고 나니 뭔가 하나 허전한 게 있었으니, 관련.. 2024. 3. 12.
쇠말뚝과 싸우던 시절의 회고 쇠말뚝이 일재잔재랑은 눈꼽만큼도 관계없다는 사자후를 내가 토해낸 때가 2005년이었다. 그 무렵 나는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를 통해 저와 같은 주장을 담은 기사를 쓰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의왕의 旺자도 日王과는 눈꼽만큼도 관계없다는 주장을 쏟아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기어코 의왕은 義旺이라는 이름이 일재잔재라며 그 한자표기를 義王으로 바꾸는 희대의 코미디가 결국은 벌어지고 말았다. 천황봉이 일제잔재가 아니란 것도 그때 사자후를 쏟아냈다. 주산 중에서도 천황天皇이라는 이름을 지닌 것이 있으니, 이것이 일제잔재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일본 천황에서 유래한다 해서 천왕天王으로 바꾸거나 하는 일이 빈발했으니, 천황은 일본 천황이기 이전에 북극성을 지칭하는 별칭 중 하나임을 모르는 무식의 소치다. 물.. 2024. 2. 27.
[문화재 기자 17년] (3) 범어사 천왕문 방화 하도 이곳저곳 싸질러 대서 언제 어디에서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한 가지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며, 그것도 자주였다는 사실이다. 남들 보기에 내가 가 본 데가 많은 듯하지만 내가 가지 않은 곳이 훨씬 많다. 부산 범어사도 가보지 못한 곳 중 하나였다. 나는 1993년 1월 1일자로 기자 생활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이후 6개월의 이른바 수습 기간이 채 끝나기 전인 그해 6월 1일자로 부산지사로 발령 나서 내 기억에는 이듬해 7월1일자로 다시 서울 본사로 발령 나서 체육부에 근무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경상도 출신이라 하지만 부산은 나에겐 생명부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되, 이곳에서의 생활 13개월을 나는 유배 생활에 견줄 정도로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런 까닭에 당시엔 내가 문화재.. 2024. 2. 20.
[문화재 기자 17년] (2) 사천성 대지진과 도강언 2008년 중국 사천성이 무너졌다. 이해 5월 12일 오후 2시28분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대지진 희생자는 사망자가 약 6만9천 명이요 부상자가 약 37만4천 명, 행방불명자가 약 1만8천 명에 붕괴 가옥은 21만6천 동이라 하니 미증유의 재앙이었다. 내 기억에 구조 활동에는 한국 사람들도 깊숙이 관여했으며, 그 직후 중국을 방문한 한국 대통령 이명박은 현지를 찾아 구조활동을 응원하기도 했다. 이런 자연의 대참사에는 으레 그 흥분이 조금은 가라앉을 즈음에는 문화재 피해 상황에 대한 후속보도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건 발생 얼마 뒤 문화재 역시 피해가 적지 않다는 외신 인용 보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 내 기억에 가장 생생한 문화재 피해 현장이 도강언都江堰이라는 곳이었다. 전국시대.. 2024. 2. 13.
누가 토건정부인가? 아마도 다음달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숫자가 100을 돌파하는 모양이다. 그 효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 출범하기가 1995년 무렵인가 하거니와 마침내 백을 돌파했다. 이런 기관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때는 놀랍게도 노무현 시대다. 개발의 광풍, 토건국가라면 보수집권 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에겐 당혹스럽다. 토건 정부는 노무현 정부였다. 이 무렵 행정도시 건설이며 지방분권화 차원에서 핵심도시 기업도시 등등을 밀어붙였는데 전 국토를 헤집었다. 작금 이명박 정부를 사대강 사업을 빌미삼아 토건정부라 하지만 그보다 몇십 배 더 땅을 헤집은 정부는 노무현 정부였다. 이 시기에 매장문화재 전문기관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다가 또 한번 획기를 맞는데 이건무 청장 시절의 이명박 정부다. 매장문화재 전문기관 설립을 대폭 완.. 2024.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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