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464 연구실 논문 신간: 동물고고학 40호 일본 동물고고학회 기관지 "동물고고학" 신간 3월호에 연구실 논문이 실렸습니다. 국립청주박물관 이양수 관장님, 우리 연구실 김지은 선생, 경희대 홍종하 교수가 함께 했습니다. 李陽洙・ 金智恩・洪宗河・申東勳. 考古学からみた韓半島における馬飼育様相の変遷. 動物考古學. 40: 1-10. [초록] 近年の考古学研究をみると、韓半島における馬の飼育は各時代によってその様相が変化し、騎馬習俗が普及する以前には、祭祀犠牲や車馬の運用のために馬を飼育していたという。 韓半島の馬の飼育は初期鉄器時代(紀元前 5〜3 世紀以降)に始まった可能性があるが、遅くとも衛満朝鮮-漢郡県の成立後(紀元前 2 世紀初頭)には、歴史学と考古学の両面から家畜馬の存在が立証されている。 一方、祭祀犠牲や車馬運用とはその系統を異にする騎馬文化が、4 世紀頃の韓半島南部に轡、鐙、鞍といった騎乗用.. 2023. 4. 1.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로 심문 자료 해방 후 5년이 지난 상태에서 20대 한국인 문맹률 상황을 볼 수 있는 자료다. https://db.history.go.kr/item/powr/main.do 포로신문보고서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현대사 포로신문보고서 ATIS Interrogation Reports 「포로신문보고서」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맥아더 사령관 예하의 「연합국번역통역국(ATIS)」이 1950년~1952년 사이 제작하 db.history.go.kr 당시 심문대상인 3천626명 중 무학이 724명, 소학교 졸업 이하가 1449명 (중퇴 포함)로 전체의 60-70프로를 차지한다. 소학교 졸업 이하는 대략 졸업과 중퇴가 반반 정도 되는 것 같다. 대학재학 이상은 193명이다. 50년대 한국군 군대 입영보도를 보면 전체.. 2023. 4. 1. 개는 변한 것이 없다 개는 변한 것이 없다. 늑대로 살아갈 때 우두머리를 따라가는 것이나, 사람과 같이 살면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는 말이다. 늑대 무리 (wolf pack)로 살아갈 때도 수컷 알파에 대해 나머지 늑대들은 그렇게 충성한다. 하지만 이는 동료 최강자에 대한 복종일 뿐 알파를 자신의 주인이라 생각할 리가 없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알파에 충성하고 알파는 반대급부로 나머지 늑대를 보호할 뿐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개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이다. 개는 늑대시절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이 없다. 개는 사람에 충성하지만 이는 사람이 개를 보호하는 것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굳이 따지자면 개가 기대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유럽봉건제 하의 쌍무적인 관계에 가깝다. 역사적으로 달라진 것은 사람이 개를 보는 시각이.. 2023. 3. 31. 주인을 보는 눈빛인가? 아무리 봐도 주인을 보는 눈빛이 아니라 우두머리를 보는 늑대 눈빛인듯 2023. 3. 30. 교육열이 "망국병"이라는데 대해 지금까지 썼지만, 한국이 해방 이전 식민지 질곡에서 헤맨 것도 결국 요약하면 "못 배운 사람들이 가득한" 문맹자 절대다수의 사회였기 때문이고, 해방 이후 한국이 성취한 경제적 성공과 민주화도 교육열 없이는 이룩하기 힘들었다. 정부도 이 기간 동안 꾸준히 학교를 늘리고 대학을 증설하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없는 나라 살림에 80년대 중반 대학생수 백만명을 넘긴 것은, 결국 자기가 먹고 써야 할 돈을 자식들 교육에 써 버린 그 당시 부모 세대들 때문이다. 이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대졸자가 그렇게 많이 나올 수 없고, 박정희 김대중 아니라 그 양반들 할아버지가 와도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이룩하지 못한다. 가끔 한국의 교육열이 망국병이라던가, 대학을 다 갈필요 있냐, .. 2023. 3. 30. 1987년 왜 거리마다 대학생이 가득했는가 1987년 6월. 거리마다 반정부시위에 나선 대학생이 가득했다. 1980년. 즉각적인 민주화를 외치며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지만, 결과는 우리가 본 바와 같다. 하나는 실패하고 하나는 성공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의 하나는. 아래와 같다. 5공화국 때 대학생 수는 이전보다 두 배가 불었다. 1985년 현재 전국적으로 대학생수가 120만명이었다. 참고로 4.19 때 대학생 수 10만 8천. 한일협정 즈음 대학생 수 13만 5천. 80년 서울의 봄 당시 57만명. 87년 6월 당시 120만명 이상. 이것이 87년 당시 가는 곳 마다 대학생 시위대가 가득했고 "넥타이부대"가 출현한 이유다. 아마 이 시대에 대학생수가 백만명을 넘기고, 대졸자가 "넥타이부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2023. 3. 30. 이전 1 ··· 325 326 327 328 329 330 331 ··· 41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