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951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투가 남긴 로마 사각 방패 1930년대에 고고학도들이 현대 시리아에 있는 고대 로마 도시 두라-에우로포스에서 뜻밖의 발견을 했다.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손상되지 않은 로마 군단의 방패다.이 발견은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방패가 시간이 지나도 거의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에 로마 군사 생활에 대한 전례 없는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스쿠툼scutum으로 알려진 이 커다란 직사각형 방패는 로마 방어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전투에서 유명한 테스투도testudo 대형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다.이 방패를 그토록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보존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한 상황이다. 서기 3세기에 사산 왕조가 포위 공격을 가하는 동안 로마 수비수들은 성벽을 강화하기 위해 방패를 포함한 장비들을 묻었다.빠른 매몰과 건조한 사막 기후가 조합함으로써 방.. 2025. 2. 17. 로마가 상기한 그리스, 너 자신을 알라 이건 꽤 알려진 서기 1세기 무렵 로마시대 모자이크화로로마 테르미니역 광장 건너편 레푸플리카 광장과 인접한 그 Terms of Diocletian 국립 로마박물관 모자이크실 비름빡에 박혔으니 본래 출토 지점은 로마 Via Appia의 Convento di San Gregorio, 그레고리 성당이라 한다.저것이 현재 걸린 건축물은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25미터에 달하는데 저 분은 대략 바닥 기준 5미터 정도 높이에 박아놨지 않았나 싶다.저 문자는 그리스어라 Γνῶθι σαυτόν“Know yourself” 너 자신을 알라 이런 뜻이라 한다.저 말을 우리 세대는 소크라테스 말인가로 배웠는데 내 기억 착란일 수도 있는데 암튼 그리스 기반 철학문구? 혹은 경구라 생각하면 되겠다.이전에 한 번 소개한 적 있다.. 2025. 2. 17. 경악스런 신석기 습지 통나무 포장도로 무슨 농경 유적 아닌가 하겠지만 꼭 엇나갔다 할 수는 없는 것이 놀랍게도 신석기시대 포장도로인 까닭이다.그때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나올 수는 없으니 또 저곳은 물이 나는 습지라 나무를 깔아 포장재로 썼다.네덜란드 드렌테Drenthe 주 에먼Emmen 이라는 도시 인근 뉴도르드레흐트Nieuw-Dordrecht 라는 마을에서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굴된 신석기시대 나무 습지 도로[wooden peat road].이 발굴은 이미 아래 글에서 우리가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했다.네덜란드 습지가 토해낸 신석기 나무고속도로저 사진은 당시 소개하지 못했는데 지금의 아스팔트 포장도로랑 비교해도 손색 없다.당시는 논문 중심으로 정리했으니 요약 삼아 한층 일목요연하게 추린다.네덜란드 Nieuw-Dordrecht 근처 신석기.. 2025. 2. 17. 신라시대 공무원 규모 19세기 조선후기를 살다간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정리한 수필집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2권에는 신라 관원官員의 숫자를 논한 글이 있으니 헌덕왕憲德王 3년(811)에 임금이 비로소 평의전平議殿에 나와서 정사를 들었다. 이때 나라의 관원들이 매달 여섯 번씩 참여하였는데, 문반文班이 710원員이고 무반武班이 540원이었다. 여섯 번 절을 한 다음 춤을 추면서 물러가다가 마루가 끝나는 계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걸어서 나갔다. 나라 사람들도 지위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보면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新羅官數 憲德王三年。始御平議殿。聽政。國官月六參。文班七百十員。武班五百四十員。六拜。舞蹈而退。至堂級。乃步。國人卑者見尊者。亦如之。 저것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언뜻 찾지 못했다. 삼국사기 헌덕왕본기에서는 그 재위 3.. 2025. 2. 17. 마라토너로 순치된 조선인, 그 슬픈 자화상 도로가 없고 그런 까닭에 이용할 마뜩한 교통편도 없어 오로지 발품을 팔아야 하는 전근대 조선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몸으로 때우기였으니, 이런 민족이 살아남고자 버둥치기 위해서는 죽어나사나 걷거나 달려야 했다. 이른바 줄행랑이 주특기일 수밖에 없으니 조선시대에 마라톤이 있었다면, 요새 에티오피아 같은 아프리카에서 독식하는 마라톤은 조선인이 독식했으리라 본다. 19세기를 살다간 박물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63)이 찬술한 방대한 분류식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보면 이 이야기가 내가 하는 이야기가 거의 그대로 보인다. 그 경사편經史篇5 논사류論史類2 풍속風俗을 보면 아예 소제목 자체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달리는 데 대한 변증설[東人善走辨證說] 이라는 짧은 글 한 편이 있으니 .. 2025. 2. 17. [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보유) 성현이 본 사금갑 지금까지 우리는 사금갑 이야기는 판본이 여러 개임을 봤다. 더욱 간단히 말하면 삼국유사가 유일본이 아님을 확인했다. 사금갑 이야기는 버전이 여러 개였다. 그 일환으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 말한 사금갑 이야기가 독특함을 이야기했다. 그에서는 왕비와 그의 내연남 내전 분수승이 복주된 이유가 반란, 곧 소지왕을 시해하려 했기 때문임을 지적했다. 한데 내가 빠뜨린 또 하나의 사금갑 이야기가 있다. 그 이전 세대 사가정 서거정 뒤를 이어 성종~연산군 연간 조선 전기 문단의 총수로 군림한 성현成俔(1439~1504) 또한 사금갑 이야기를 남겼으니, 어떤 점에서 그가 말한 사금갑은 다른 사금갑 이야기와 만나며 갈라지는가? 그의 불후한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 권 제2에 보이는 한 토막이다. 신라왕[소지왕.. 2025. 2. 17. 이전 1 ··· 70 71 72 73 74 75 76 ··· 492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