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일제강점기의 심층이해43 조선에는 없던 구제고등학교 해방 전 조선에는 구제고등학교가 없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 (고보)가 고등학교라고 오인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고등학교가 조선에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일제시대에는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제대로 된 코스였다. 물론 고등학교 들어가지 않고도 대학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주 어려웠다.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코스를 밟지 않으면 제대로 된 대학을 쉽게 들어갈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조선에서 고보를 나온 조선인들은 대학 진학이 쉽지 않았다. 이 구제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유일한 조선의 학교가 경성제대 예과다. 대학예과와 구제고등학교는 급이 같고, 중학교와 고보가 급이 같은 중등학교다. 일제시대에 위와 같은 모자가 구제고등학교 모자였다. 이수.. 2025. 9. 14.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다 이 부분은 언젠가 필자가 한 번 썼지만 심지어는 일제시대를 공부한다는 분들 중에도일본 구제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싶은 글들이 보여이 기회를 빌어 다시 여기 조금 써 본다. 필자가 알고 있는 지식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지금 국내에서 통용되는 일제시대 구제교육에 대한 정보보다는 자세하고 정확할 것이다. 일제시대 교육제도에 대한 우리의 오해 중 가장 큰 것은 고보를 고등학교로 보는 것이다. 이건 완전한 착각인데, 일제시대 고보는 5년제로 소학교 6년을 마치고 진학하는 학교였다. 어차피 우리도 고등학교 중학교 합해서 6년이니일제시대 5년제 고보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고보는 고등학교가 아니고 일제시대에는 중등과정이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학교를 졸업하면 상급학교.. 2025. 9. 14. 1920년대의 치약 조선의 신문 광고에서 자주 등장하는 치약 광고는 "쿠라부 치마"다. 치마란 치약을 당시 일본에서 부르던 이름인데,일본에서 치약은 메이지 이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이 시기가 되면 치약가루(치마분), 액상치약, 크림형 치약 (연치마) 등으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대체로 지금의 치약과 비슷한 것은 크림형 치약인 연치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 국내에 통용되던 치약은 모두 수입품으로 국산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쿠라부 치약은 당시 꽤 유명했는지인터넷에는 1920년대의 이 치약에 대한 리뷰가 꽤 보인다. *** [편집자주] *** 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칫솔과 치약, 나아가 치과학 도입에 앞선 시기 저 양치질 문제와 치과 치료 문제는 생존과 직결하는 문제 아니었겠는가?오죽 저 치통이 문제였으면.. 2025. 9. 13. 1920년대의 이병도 이병도 선생은 일전에 한 번 살펴 본 바 있으나 그 내용을 전제하고 좀 더 보강하여 자세히 적어본다. 선생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했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쳤으며, 이어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진학, 고등예과(高等豫科)를 거쳐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를 졸업했다.요약하면: 한성보광보통학교-중동학교-보전 법률학과 (1915)-와세다대 고등예과-동 문학부 사학 및 사회학과 졸 (1919)이다. 중동학교는 고보 (중학) 졸업이니 보전 입학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어 와세다대 고등예과를 들어갔다고 한다. 선생은 보전 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같은 학력을 얻었기 때문에, 예과를 들어갈 .. 2025. 9. 13. 일제시대 나오는 조선인 업적은 모두 총독부 공인가 일제시대에 대한 우리의 역사학적 클리셰가 수탈이다 보니 일제시대 조선인이 만들어낸 업적에 대해서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시대에 조선인들은 모두 수탈에 신음하고 있어야 한다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런데 그럴 필요 없다. 일제시대에는 당연히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그것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주 조직적으로 있었다. 단순히 감정상의 차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인들도 그냥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차별에 대한 저항을 생각하자면 대개는 독립운동이나 동맹휴학등만을 생각하는데, 차별을 뚫고 놀라운 업적을 만든 사람도 많다. 우리는 흔히 이런 사례로 손기정만 생각하는데 각 분야에서 다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일제시대에도 세계에 대한 소식은 충분치 않지만 조선인들에게 계.. 2025. 9. 13. 두계 이병도의 등장: 1923년 1923년에는 동아일보에 두계 이병도 선생의 "조선사개강"이 연재된다. 이것이 아마도 두계가 공식적으로 대중에게 자신의 사론을 발표한 첫 번째가 아닌가 하는데 (아닐 수도 있다)1923년 동아일보에서는 무려 1면 다단기사로 두계의 사론을 싣기 시작,총 60여 회를 연재했다. 두계가 1896년 생이니 이때 나이 서른도 안 되었던 셈이다. 1920년대 문단과 학계의 전면에서 활약한 이들은 대부분 그 정도 나이였다고 본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이광수도 1892년 생으로 두계보다 4살이 많다. 따지고 보면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사람들인데, 그 앞에 이런 분야에서 신풍조를 받아 일할 이가 워낙 없다 보니 대략 1890년 생들이 1920년대에는 벌써 전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2025. 9. 13. 이전 1 2 3 4 5 6 7 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