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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과 족보 이야기422

프리미어 리그 승강제 같았던 조선의 신분제도 필자는 축구를 팬이라 할 정도로 따라다니며 보는 정도는 아닌지라무슨 화제가 있으면 찾아보는 정도인데 요즘 우리 손흥민 선수가 있던 토트넘이 자칫하면 프리미어 리그에서 2부리그로 내려갈 판이라 하니 찾아보니 토트넘이 50년부터 1부리그에서 쫒겨난 해가 딱 한 해밖에 없단다. 기사를 보니 이번에 토트넘이 2부리그로 내려가면 파산할 위가라 무슨 수를 써서도 1부리그에 남아야 한다고 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딱 이와 같았다. 예를 들어 전통의 명가, 아스날이나 맨유 같은 경지에 오른 대대로 문과 급제자 내고 못 해도 진사 생원은 해먹고 그것도 아니면 유학호라도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양반층이 프리미어 리그 상위권 팀들처럼 군림하고 있다면그 아래에는 언제 프리미.. 2026. 5. 17.
노비와 서자를 전면에 띄워야 비로소 이해 가능한 조선사 요즘은 조선시대에 노비와 서자가 바글바글했다는 사실 자체는 왠만한 사람은 다 안다. 노비가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 시절이 불과 몇백 년 전이라는 이야기를 들어그 자체만으로 놀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미 추노 등 드라마로도 충분히 예방주사를 맞은 격이며 미스터선샤인이던가 거기서도 주인공은 노비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서자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면그것도 뭐 그냥 그럭저럭 이해들을 한다는 반응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이, 이렇게 노비와 서자가 인구 대부분을 차지할 판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정작 조선사를 통사로 배우게 되면 이런 사실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느닷없이 자본주의 맹아론과 상품화폐경제를 17세기에 설정하질 않나, 노비나 서자라는 구체적인 계층을 깔고 서술해야.. 2026. 5. 17.
만만해서 동원하기 쉬운 서자들, 이들의 시각에서 북방 사민도 봐야 한다 이쯤에서 이제 굳이 복잡하게 글을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간단히 정리하여 써 보겠다. 앞에서 쓴 향촌 중인, 조세 부담자 중 상위계층으로 평소에는 조세를 안 부담하던 이들, 향교에 등록하여 교생이라 칭하고는 과거 보는 데는 뜻도 없고 군역 면제나 받으려 한 자들, 양반들이 모여 이들을 "놀고 먹는 놈들"이라고 부른 이 사람들은 18세기 무렵 호적을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느 향촌에서나 양반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민도 아닌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서자 출신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서자의 숫자.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그 숫자는 절대 적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는 위에 서자가 있으면 그 아래로 후손들이 줄줄이 금고되는 나라라, 시골 바닥에 대대.. 2026. 5. 17.
보낼 사람이 없는 북방 사민, 중앙에서는 인원 할당만! 필자가 장황하게 향촌 중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우리나라 조선전기의 북방사민 때보낼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앞에서 우리나라 호적은 열명 중에 한두 명이 간신히 기재되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써 놨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호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호적을 한 번 보면 대략 도대체 누구를 뽑아 사민에 보낼 것인가관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없 을리가 없겠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양반의 아래에는 노비가 다수 속해 있었고, 양반이건 노비건 간에 북방 사민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사민의 대상은 관에 속한 노비이거나, 아니면 농사 짓는 평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즉,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평민 역시 귀중한 세금 부담자로서, 이들을 보내버리면 우리 동네에 세금 낼 사람이 없다는 .. 2026. 5. 16.
땡땡이들이 만든 역사 조선의 역사는 노비 사역을 중심으로 한 시대가 있었다. 이 시대는 잘 나가는 양반이 수백명 노비를 거느리고농장이나 다름 없는 땅에서 농작물을 뿌리고 수확하는지라 대규모 경작이 대부분이라 그 안에서 먹고 살 농산물이 대부분 생산되고 그러고 남는 건 선물의 형태로 있는 집끼리 서로 교환해 살았다. 그러다 보니 화폐가 돌 일도 없었고시장도 있어봐야 뻔했다. 있다 해도 사 올 물건도 없고, 팔 물건이 있어도 주변 사족들에게 선물로 주어 인심도 얻고나중에 그에 해당하는 선물로 보답 받는 것이 모르는 사람하고 돈으로 거래하는 것보다훨씬 남는 인간 관계인 것이다. 이런 상태가 대략 18세기 초반까지도 계속되어 동네마다 수백 노비를 거느리고 사역시키는 양반이 즐비한 것이 우리나라 사정이었다. 이런 판에 이 시절 우리나.. 2026. 5. 16.
"잔반"은 진짜 몰락한 양반인가? 북방 사민 이야기를 계속 쓴다. 우리는 "잔반"이라는 말을 어떤 때 쓰는가 하면, 19세기 말 가진 것도 하나 없이 양반 코스프레를 하는 평민과 차이도 없는 이들을 가리킬 때다. 예를 들어 19세기가 되면 향촌에 잔반이 급증하였다, 양반 호구가 70프로가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 확실한 양반 계급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평민이랑 진배 없는 이들을 "잔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유학모칭자", "양반모칭자"와 거의 비슷한 용도로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19세기의 유학모칭자, 양반모칭자, 잔반은 그 시절 호적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집에 노비 딱 한 명을 데리고 있고, 주호는 유학이다. 친가 3대조와 외조부, 그리고 처가 3대조와 그 외조부도합 여덟 분이 호적에 기재되어 있으니 양반의 틀은 갖추었.. 202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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