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호적과 족보 이야기422 19세기를 달리 보는 법 이전에 쓴 것 같지만 필자는 18세기 중엽 영조 이후 19세기를 격변의 시대로 보며 이 시기는 암울하게 채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18세기까지도 노비를 사역시키며 양반들이 대책없는 세월을 보이고 있어 누가 정체되었다고 이야기 해도 할 말 없을 조선땅에도 18세기 중엽이후영조라는 불세출의 군주가 다스리는 동안 격변이 시작되어 19세기가 되면 경천동지의 변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기 시작, 그 흐름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밖에 나가면 귀족도 없고 평민도 없고 조상이 누군지도 모르고 우리 조상들은 전부 한 자리 하는 양반들이고 나는 그 후손이라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18세기 이후 우리 사회가 겪던 긍정적 변화의 최종 종착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19세기 말 변.. 2026. 5. 18. 만인소는 백성의 소리인가 요즘 만인소에 대해서는 이렇게 해석들을 하는 것을 보는데, 물론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런 프로파간다고 필요하겠지만, 만인소에 대해서는 좀 더 비판적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앞에서 썼듯이 만인소를 올린 이들이 향촌사회에서 정체성이 뭐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향촌의 사족이지만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미 유학 하나 간신히 유지하는 것 정도로는이른바 모칭 유학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가 바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라, 대원군은 서원철폐 때 향촌 사족들이 서자들을 때려 잡을 때 하던 말 그대로, "놀고 먹는 놈들이 백성들을이나 괴롭히고 있다""너희는 서원이 아니면 책 읽을 곳도 없느냐"며 모욕적인 말을 날리며전국 그 많던 .. 2026. 5. 18. 하재일기- 저물어 가는 세월이 아쉬워 삥 뜯는 양반들 하재일기는 별기대 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는데우리나라 19세기 후반의 경제상황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소득이 있었던 일기이다. 하재일기를 보면 물론 서울이 중심이고, 또 권력 중앙에 가까운 어용 물품 공급자가 개화의 물결 속에서 근대적 자본가로 바뀌어 가는 양상이 생생이 담겨 있는 바, 하재일기를 쓴 지규식 선생은 20세기 결국 한국사의 주인공이 된 사기업 경영자의 선구를 이룬다고 해도 좋겠다. 하재일기에는 원래 정부에 분원공소 공인이었던 저자가 구한말 분원을 민영화 하면서 사기업으로 전환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여기 보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오는 것이이미 정부가 손을 떼고 사실상의 사기업이 되어버린 분원에 양반들이 자꾸 그릇 구워 바치라는 부탁 아닌 협박을 넣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옛날에는 정.. 2026. 5. 18. 19세기 만인소,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유학幼學들 만인소라는 것이 사실 그 이전에도 있긴 한데19세기에 만인소가 여러 번 반복되었고, 실제로 지금 남아 있는 것도 19세기 만인소로 안다. 여기서 의문-. 이 만인소에 서명한 이들은 도대체 향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만인소 서명을 서원을 중심으로 통문이 돈 것으로 아는데, 쉽게 말해서 흔히 이야기하는 촌동네 청금록-향안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만인소에 참가했으리라는 것은쉽게 추정이 가능한 바, 문제는 이들이 만인소에 서명하면서 써 놓은 직역을 보면진사 생원도 별로 없고 죄다 유학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이 만인소가 작성되던 19세기 중반이되면우리나라 동네마다 유학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던 시절이다. 유학을 칭하는 양반 아래에 수백의 노비가 줄줄이 달려 있던 호구가 무너지고, 한 마을에 아버지, 어머.. 2026. 5. 18. 사생아가 멸망시킨 잉카제국, 그에서 유발하는 조선 북방 사민의 비밀 필자가 우리나라 사민 사업에서 하삼도의 서자가 많이 끼어 이주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사실 이런 현상은 우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세거지에서 잘 먹고 잘 살던 이들이 뭐가 아쉬어 배타고 나가고, 오랑캐들 사는 북방으로 가겠는가. 일본도 북해도 개척은 메이지유신 단계에서 패퇴한 구 막부측 번의 번사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북해도로 이주하여 사선에서 발악하며 개척한 것이니,세계 어느 나라건 다 비슷했다 할 것이다. 북해도에 가면 다테시伊達市라는 곳이 있는데,이 다테가 바로 센다이번仙台藩을 세운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할 때 그 다테이다. 센다이번의 영주 성을 딴 도시가 북해도에 들어선 것은 이 센다이번이 메이지유신 때 천황군에 맞서 싸우다가 절단이 나버려서그 번사들이 갈 곳이 없어 북해도로 집단.. 2026. 5. 17. 일단 북방으로 강제 차출한 사람들, 그 이후는? 북방 사민은 흔히 세종대의 사건으로만 보지만실제로는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 중앙의 관심이 쏟은 국가 프로젝트라북방에 여진족이 준동하거나 아니면 전염병이 도는 등북방을 혼란에 빠뜨릴 일이 벌어지면 중앙의 비상한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범상하게 넘기는 것이 있으니, 왜 윤관 때는 실패한 사민 사업이 세종 때는 성공했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는 해답을 낼 만한 역량이 되지 않지만 북방 사민이라는 게 그냥 사업을 벌인다고 성공하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사민 사업이 정말 대단한 것이 두만강 압록강 선까지 진행된 것이 15세기였는데, 같은 위도에서 일본이 열도에서 사민이 진행된 것은 19세기 후반이나 되어서의 일로, 북해도 개척이 메이지유신 이후에나 본격화했다는.. 2026. 5. 17. 이전 1 ··· 3 4 5 6 7 8 9 ··· 7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