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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와, 다 받아줄께 떨어지고 남은 매실 그 열매가 일곱일세 나를 찾는 뭇 남자들 길일만 고르면 된다네 떨어지고 남은 매실 그 열매가 셋이라네 나를 찾는 뭇 남자들 오늘 당장 와도 된다네 떨어지고 남은 매실 광주리 가득 채웠다네 나를 찾는 뭇 남자들 말만 하면 된다네 ㅡ 《시경詩經》, , 소남召南, "떨어지고 남은 매실(표유매摽有梅)" 2023. 11. 12.
태실胎室과 석함石函, 그리고 그 구조 태실(석함) 胎室(石函) Placenta Chamber(Stone Case) 조선 | 높이 120cm | 지름92cm Joseon / H. 120cm 1D.92cm National Museum of Daegu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났을 때 오래 살기를 바라며 태胎를 모셔둔 곳이다. 태실에는 주인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적은 태지석胎誌石과 태를 담은 태항아리胎壺가 있다. 이 석함은 태지석과 태항아리를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몸돌과 뚜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 석함은 1980년 무렵에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의 오미봉 정상에서 발견되었다. 발견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문혀 있던 석함의 뚜껑이 열렸는데, 그로 인해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사라져 태실의 주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석함은 오미봉 정.. 2023. 11. 12.
고대의 코끼리표 밥통: 무쇠솥 요즘은 쿠* 밥통이라는 소위 K 밥통이 전 세계를 휩쓰는 터라 젊은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해외 나가면 너도나도 일제 코끼리 밥통을 사들고 오는 때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일제 밥통보다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었지만 그래도 몰래들 들고 들어오는 이유는, 어머니들 보기에 밥맛이 다르다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즘은 이러한 역할을 쿠*밥통이라는 K 밥통이 그러해서, 탈북자를 이야기를 들어보면 K 밥통에서 목소리로 밥 다 됐다고 알려주는 기능을 죽이고라도 이 밥통은 반입되는가 보다. 밥맛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철로 빚어낸 가마솥-. 소위 무쇠솥은 그 당시의 코끼리표 밥통이자 K 밥통이었을 것이다. 이전까지 쪄서 익혀 먹던 밥맛이 똑같은 쌀을 쓰고 잡곡을 쓰고도 밥맛이 달라지는걸 보고 아마.. 2023. 11. 12.
개체굴, 산란하지 않는 대따시 굴 3배체굴은 염색체가 3쌍으로 산란을 하지 않아 산란기 독소가 없으니 사계절 내내 먹을 수 있습니다. 덩이굴보다 2.5~3배 빠르게 성장하고, 맛이 진하고 향긋합니다. 일부러 홀수배체로 만들어서 몇 년 전에 개발한 양식 굴입니다. 양식할 때 스티로폼 부표 사용이 적어서 친환경적입니다. 개체굴은 요즘 지역마다 전략적으로 육성하고 있어서 통영, 고성, 고흥, 신안 등지에서 양식이 많이 늘었습니다. 지금은 비싼 편이지만 조만간 싼 가격에 시중에 나올 것입니다. 이상 조명치 특별전 한 방으로 방뜬 국립민속박물관 김창일 학예연구사 소개다. 산란하지 않음 후손은 어찌 생산하는가? 이런 물음에 김군이 이렇게 답한다. 3배체 개체굴 종패 생산을 하는 업체에서 4배체 어미생산과 채란, 수정을 해서 3배체 유생 양성후 종패.. 2023. 11. 12.
쌀밥 때문에 남하한 고구려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뭐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쌀밥 때문이다. 그만큼 쌀은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우수하며 맛이 탁월하다. 원래 고조선-한군현이 있었다는 낙랑평원은 일찍부터 쌀 농사가 시작된 곳이고 필자 짐작으로는 아마 이곳을 경유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쌀농사도 확산했다고 보지만, 삼국시대쯤 되면 쌀 생산은 이미 한반도 남부가 북부를 압도한지 옛날이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남하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쌀밥 먹기 위함도 그 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본다. 잡곡밥만 먹다가 쌀밥을 먹자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으리오? 2023. 11. 12.
한달치 봉급으로 장욱진 그림을 산 김원룡 이 작품을 포장하며 장욱진 화백은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김원용씨는 이제 한달동안 무얼 먹고 사나?" *** Editor's Note *** 김원룡은 1세대 고고학도 겸 미술사학자로 국립박물관에 봉직하다 1961년인가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자 그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한동안 혼자 교수였고 신생인 데다 인기가 없는 학과라 매양 신입생 모집 때마다 미달 사태가 나서 괴로워했다. 이후 잠깐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땐 교수가 봉급으로 생활할 때가 아니었다. 삼불이라는 호를 쓴 그는 각종 정부 위원을 독식했고 각종 회의에 참석했다. 지금도 각종 회의에 불려다니며 짭짤한 수입을 내는 고고학 교수가 더러 있다. 아마 그 수당이 봉급에 육박할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장욱진 걱정과는 달리 적어..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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