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0979 모아이 석상의 고장 라파누이 섬은 고립되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고고학자들은 라파누이Rapa Nui(이스터 섬Easter Island)를 폴리네시아 문명의 최전선, 즉 서기 1200년경 최초 정착 이후 완전히 고립된 외딴 전초기지로 묘사했다.이러한 주장은 태평양 고고학계를 지배하며, 이 섬의 유명한 모아이 석상 moai statues과 의례 단지를 더 넓은 폴리네시아 세계와 단절된 사회의 산물로 묘사했다. 그러나 웁살라 대학교에서 Antiquity에 발표한 획기적인 새로운 연구는 이러한 오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라파누이는 단순히 폴리네시아 문화를 수용한 곳이 아니라, 의례 사상을 태평양 전역으로 전파하여 동폴리네시아 전역의 성지 발전에 영향을 미친 적극적인 혁신가였음을 밝혀냈다.서쪽으로의 물결: 이스터 섬의 신성한 건축물 수출곧 권위 있는 학술지인 앤티.. 2025. 7. 8. 인도 라키가리 유적 조사의 한 단면 홍종하 선생이 올린 과거 사진이라, 보니 2015년 포스팅이다. 저 무렵 홍 선생이 포함된 신동훈 교수팀이 인도 라키가리 유적 조사에 투입되어 현지조사를 했다. 이 조사 관련해서는 신동훈 선생이 여러 차례 걸쳐 소개했다. 그 조사보고서 제1권이 영어판으로 출간됐고 지금은 그 후속 보고서 작업 중인 것으로 안다. 이 조사가 한국고고학에서는 자연과학, 고인류학의 첫 해외 진출로 알거니와 그런 점에서 대서특필해야 할 사건이다. 2025. 7. 8. 중세 성채에서 똥싸는 방법과 장소 당시 프리비privy 또는 가르데로브garderobe라 일컫던 중세 화장실은 원시적인 형태였지만, 성 안에서는 다른 곳보다 조금 더 편안하고 훨씬 더 많은 디자인적 노력을 기울였다.실용성, 프라이버시, 그리고 효율적인 폐기물 처리가 모두 고려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폐허가 된 중세 성에서 가장 눈에 띄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외벽에서 튀어나온 변소다.가르데로브garderobe라는 용어는 나중에 프랑스어로 옷장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원래 의미는 성 화장실에서 필요 이상으로 크지 않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변소는 일반적으로 성벽에 내장되어 코벨(corbel, 성벽 일부) 위로 돌출되어 있었고, 오물은 성 해자로 흘러내렸다.때로는 오물이 강으로 바로 흘러가기도 했고, 어떤 성에서는 안뜰이나 외벽으.. 2025. 7. 8. 구석기 소뼈를 발굴하는 사람 소 화석을 본 적 있는가?이 사진은 리키 재단 Leakey Foundation 수혜자인 데바라 아닐Devara Anil이 인도 안드라프라데시 주 모트라불라파두 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보스(Bos) 속의 특정되지 않은 종 화석 골격을 발굴하는 모습이다.보스 속에는 현대의 가축과 야생 소뿐만 아니라 오록스aurochs처럼 현재는 멸종된 종도 포함한다. 데바라Devara는 인도 간디나가르 인도 공과대학교 Indian Institute of Technology Gandhinagar(IIT) 연구 조교수다.그의 연구는 인류가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 나갔는지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이와 같은 소과 화석bovid fossils은 고대 생태계와 우리 조상이 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했는지에 대한 더욱 완전한 그림.. 2025. 7. 8. 여전히 오리무중한 미노스 원반 이 고대 문자는 한 세기 넘게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현재 파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k으로 알려진 이 원반은 현대에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1908년 7월 3일, 이탈리아 고고학자 페데리코 할베르Federico Halbherr와 그의 제자 루이지 페르니에Luigi Pernier, 그리고 그의 연구팀이 크레타 섬 남부 파이스토스Phaistos에 있는 미노스 궁전Minoan palace 유적을 발굴하던 중, 유적 가운데 지하 퇴적층을 발견했다.페르니에르는 퇴적층 안에서 새까맣게 탄 뼈와 재, 그리고 그 가운데 반쯤 묻힌 금빛 갈색 점토 원반을 발견했다.페르니에가 원반을 꺼내 손바닥에 쥐어보니, 원반의 양면에는 나선형으로 눌려 있는 일련의 작은 그림들이 덮여 있었다.100년이 넘은 오늘날.. 2025. 7. 8. 위대한 18-19 세기 필자가 생각건데 17세기까지 강고하게 이어온 노비 사역의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특정시대에 갑자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우리 역사에서 일부 지배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민은이러한 노비에 방불한 신분 억압의 상태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18-19세기의 노비해방과 신분 상승운동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이다. 이 시기에 비로소 수천 년을 이어온 신분제 질서가 동요하게 되고 그 틈을 타고 불과 백년 전만 해도 노비가 절대다수였던 향촌에 너도나도 양반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불과 백년만에! 놀랍지 않은가? 실제로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20세기 우리가 목격한 한국사회의 변화보다더 격렬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2025. 7. 8. 이전 1 ··· 147 148 149 150 151 152 153 ··· 3497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