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분류 전체보기21910

상업성이 없는 책을 내주어? 그런 책은 내지 마라 책을 줏어들고 서문을 읽다 보면 유독 저런 말투 혹은 저 엇비슷한 문구가 많이 발견되는데, 저런 말은 내 기억에 유독 한국과 일본에 많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이렇게 상업성이 없는 책을 내주어 이 책을 내주는 출판사 혹은 그 대표한테 고맙다 블라블라하기 마련이라, 내가 볼 때 심각한 대목은 그 다음이다. 그렇다면 왜 상업성이 없는가?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네들이 내세우는 논리라, 한결같이 하는 말이 이 책은 학술적이어서... 도대체 이 말은 무슨 개떡 같은 소린가? 학술적이라 상업성 혹은 가독성이 없다니? 무슨 이런 개떡 같은 소리가 있단 말인가? 말한다. 학술적이라 상업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학술적이지 아니해서 상업성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팔리지 않을 뿐이다. 가독성 없는 책, 독자가 없는 글.. 2023. 6. 20.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또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by 이희승 외곬생애 내 나이 이미 여든이 훨씬 넘어 아흔을 바라본다. 단순히 시간의 뜻으로 보면 80여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오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한국시대에 태어나 온갖 역사의 비바람 속을 헤쳐 오늘에 이른 우리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지나간 80여 년이 자못 힘겹고 오랜 세월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외람된 얘기 같지만 대한제국, 일제 35년, 미군정, 자유당 정권, 민주당 정권, 5․16혁명과 공화당 정권을 차례로 겪어야만 했던 세월이다. 또 역사상 미증유(未曾有)의 양차 세계대전을 직접 간접으로 받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뿐 아니라 6․25사변 같은 참혹한 집안 싸움도 견디어내야 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살면서 겪어야 했던 갖가지 경험이야말로 평화 시절 수백년간의 경험과 맞먹을 만하지 않겠는.. 2023. 6. 20.
둘째언니 드라마 "추노"를 통해서 최근엔 좀 알려진 사실인데, 원래 '언니'란 단어는 누이동생이 여자 형(?)을 부르던 호칭일 뿐만 아니라 남자 아우가 형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다. 그 실제 용례를 여초 김응현(1927-2007)과 일중 김충현(1921-2006)에게서 본다. '선경'은 여초 선생의 자다. 2023. 6. 20.
해발 800미터 장수 대적골 제철유적 전북 장수군 일원에서는 근자 지표조사를 통해 70여 개소에 이르는 제철유적이 확인됐으니, 장계면 명덕리 일대 이른바 대적골 제철유적 또한 개중 한 곳이라, 이 일대에는 이미 군산대학교박물관이 2016~17년 시·발굴 조사를 실시해 철 생산과 관련된 흔적을 확인했으니, 그 성과는 《장수 대적골·신전리 제철유적》이라는 이름으로 2019년 장수군과 함께 공간되었다. 기존 발굴성과는 아래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고, 위선은 올해 발굴조사 개요를 소개한다. 이번 장수 대적골 제철유적[3차] 조사는 2020년 발굴 결과 건물터가 드러난 ‘라’ 구역 주변에 대한 시굴조사와 제련로를 비롯한 철 생산시설이 확인된 ‘다’ 구역 주변에 대한 학술조사다. 장수군 의뢰로 (재)전주문화유산연구원이 낙찰받아 2022년 10월 27일 .. 2023. 6. 20.
학문과 정치, 그 기묘한 결합 구미권이라 해서 이른바 직업적 학문종사자가 정치로 뛰어들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더러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우리에 견주면 아주 드물고 또 실상 그런 간헐한 경우라 해서 들여다 보면 이 사람은 애초 직업적 학문종사자라기보다는 교수니 연구원이니 하는 타이틀은 권력으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에 지나지 아니해서 학자로서의 업적은 실은 볼 만한 구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으니 이런 자들의 정치투신은 학자로의 본령에서의 탈피가 아니라 실상 복귀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동아시아권인데 중국 일본과 비교해도 한국은 아주 특이해서 직업적 학문종사자로 분류할 만한 사람들로서 사회참여라는 이름으로, 또 그것이 연구자의 본령 중 하나라는 믿음으로 틈만 나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이가 천지사방에 늘렸으니 이는 중국에서도, 일본에.. 2023. 6. 20.
전문성이 부족한 조선의 "학자" 조선의 학자, 특히 조선후기의 "학자"는 우리가 아는 학자가 아니다. 근대의 학자가 갖춘 전문성, 직업으로서의 학자로서의 자각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연구"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해도 좋다. 조선후기 과거를 보면 그 많은 선비가 몰려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글 하는 사람은 많았다고 해도 읽을 만한 글 별로 없이 문인끼리 뻔한 소리 복붙이 반복된 가장 큰 이유는 학자들이 전문성을 자각하고 이걸로 밥먹고 살겠다는 근대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치열할 리가 없고, 대충 자신의 치장에 족한 수준이다 싶으면 관두고 정치판을 누볐다. 조선후기의 소위 학자라는 사람은 대부분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조선후기 선비들의 독서목록을 보면 편협한 독서편력이 눈에 띄는데, 학자가 아니었으므로 폭넓게 읽을.. 2023. 6. 20.
반응형